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에서

by 꿈강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보았다


간소한 선(線)


유리컵에

조르르

물 따르는 소리


일상적인 조용한

숨소리와

석양빛


가늘어져 살짝 뾰족한

그 끝

그 입가


그만해도 좋을

옛 생각들


단조롭게 세운 미래의 계획

저염식 식단


이 모든 것을

모사할 수 있다면


붓을 집어

빛이 그린 그대로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따라 그려보았다

- 문태준, <어떤 모사> -



그루터기만 남은 가을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그루터기를 캐내다 보면 하루가 검고 거칠게 저물어요

그러나 나는 기억해요

수직으로 자라 내뻗던 옥수숫대 위에 서걱대던 물살을

옥수수의 익살스런 말과 바람의 웃음을

- 문태준, <가을날> -



오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외롭고 깊고 모진 골짜기를 떠나 저 푸른 골짜기로


그는 다시 골짜기에 맑은 샘처럼 생겨나겠지

백일홍을 심고 석등을 세우고 산새를 따라 골안개의 은둔 속으로 들어가겠지

작은 산이 되었다가 더 큰 산이 되겠지

언젠가 그의 산호(山戶)* 들르면

햇밤을 내놓듯

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 위에 내놓겠지

- 문태준, <골짜기> -

*산호: 산속에 사는 화전민의 집.



흥천사 서선실(西禪室) 층계에

앉아 듣는

가을비 낙숫물 소리


밥 짓는 공양주 보살이

허드렛물로 쓰려고

처마 아래 놓아둔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


숨어 사는 단조로운 쓸쓸한

이 소리가 좋아

텅 빈 양동이처럼 앉아 있으니


컴컴해질 때까지 앉아 있으니


흉곽에 낙숫물이 가득 고여


이제는 나도

허드렛물로 쓰일

한 양동이 가을비 낙숫물

- 문태준, <가을비 낙숫물> -



달이 연못을 밟는다

맑고 깨끗하고 조용한 은막(銀幕) 위를


달빛이, 야생의 흰 코끼리가 연못을 밟는다

온순하고 낙천적인 투명 유리를 깨트리면서

- 문태준, <단순한 구조> -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 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



아무데나 다 있는 파도의 긴 나팔

톳이 이만큼 자랐듯

먼 뭍으로 흐늘흐늘하며 자라는 뱃고동


빈 소라 껍데기에 넣어 오는

석양

젖은 모래


나앉은 갈매기와

하얀 발등의 해안선

- 문태준, <비양도에서> -



어쩌면 당신에겐 아직 소년의 얼굴이 남아 있습니까 물아래 말갛고 조용한 모래들이 서로 반짝이듯이 하십니까

나는 멀리서 와서 당신의 잔잔하고 고운 말들 듣습니다 그리고 내 종이배에 싣습니다 나의 생일과 어제 꺾은 칡꽃과 나의 걱정과 함께 당신의 깨끗한 시내를

나는 여기저기에 솟을 돌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나는 엉클어진 내 생각들의 사이를 지나갑니다 시작되는 밤을 지나갑니다

오늘밤엔 종이배에 젖니 같은 샛별과 너른 밤하늘이 가득합니다

나는 당신의 새벽을 지나갑니다 까마귀 떼가 검은빛들이 푸더덕거리며 사방으로 날아 흩어지는 것을 봅니다

당신의 새파란 앞가슴에 새잎 같은 초승들이 앳된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나는 동이 트는 당신을 지나갑니다

- 문태준, <종이배> -



바다 맞은편에 눈 덮인 큰 산이 있고

오늘만큼 바닷빛은 말린 생선의 은비늘 같지만요

그리운 이 찾아 무슨 좋은 기별이라도 가듯이

산 쪽을 향해 바다가 제 몸 밀어 갈 적에는

당신이 웃는 그 모양 그대로

바다의 이는 유난히 희고 튼튼해요

- 문태준, <겨울 바다> -



날이 화창해지고

삼나무 숲에서 새가 다시 운다

내가 무거운 물이라면

이것은 물비늘 같은 음(音)

내가 옹색한 구렁이라면

이것은 빛의 쾌적한 시야(視野)

새는 타고난 목소리로

고유한 화법으로 말을 한다

나는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감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새는 말끝을 높게 올리거나

옆으로 늘이며 말을 한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새가 다시 울기 시작할 때

국지성 호우를 만난 여름도

그늘의 풀도

나도

생화(生花)를 받아든 연인의 두 손처럼

낙담을 잊는다

- 문태준, <새가 다시 울기 시작할 때> -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 문태준, <석류> -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새로 돋아난 여린 잎사귀 사이로 고운 새소리가 불어오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햇살 아래 나뭇잎 그림자자 묵화를 친 것처럼 뚜렷하게 막 생겨나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 끝에서 보았네

조그마한 샘이 있고 샘물이 두근거리며 계속 솟아나오는 것을

뒤섞이는 수풀 속에서도 이 오솔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네

- 문태준, <오솔길> -



이만한 물항아리를 하나 놓아두려네

생활이 촉촉하고 그윽하도록


산은 지금 보드라운 신록의 계절

신록에는 푸르고 눈부신 예언의 말씀


산에 든 내 눈동자에는

물의 흥겨운 원무(圓舞)


물항아리를 조심해서 안고 집으로 돌아가네

- 문태준, <산중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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