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 부장 교사가 점심시간에 학년 회의를 하자며 메시지를 보냈다.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11월 말이었다. 예정에 없는 회의였다. 나는 점심을 서둘러 먹고 학년 교무실로 향했다.
나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 소도시의 여자고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임용 고시를 한 방에 통과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대학 동기 30명 중, 나와 같이 초수에 임용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2학년 담임을 맡은 나는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냈다. 맹위를 떨치던 코로나가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학교는 여전히 코로나 시국이었다. 선배 교사들은 코로나로 인해 학교생활이 좀더 복잡해졌다고 했다.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해야 했고 시험 감독을 할 때는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면 방호복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감독을 해야 했으며 코로나로 결석한 학생들의 증빙 서류는 훨씬 더 복잡했다는 이야기였다.
코로나 때문에 좋은 게 하나 있다고 했다. 현장체험학습이 없어졌다는 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를 벗어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참 좋은 기회가 아닌가. 선배 교사들의 말로는, 현장체험학습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게 만만찮다고 했다. 안전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어찌어찌 한 학기를 보내고 2학기를 맞으니, 나도 제법 선생티가 난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나도 내가 어느 정도는 선생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김 선생!’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고, 학생들이 상스러운 소리를 하면 불러다가 훈계하고 싶은 마음이 울뚝불뚝 솟아나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학년 교무실 문을 열었더니, 2학년 담임 대부분이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꼴찌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옆 반 담임이 교무실 문을 밀며 들어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 교사가 학년 회의에 맨 꼴찌로 들어오는 게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겠기에 말이다.
“다 오셨으니, 학년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학년 부장이 말했다. 학년 부장은 30대 후반으로 부장 교사 치고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담임교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말고사 끝나고 현장체험학습을 가야 합니다."
가볍게, 교무실이 술렁였다. 코로나가 살짝 누그러지자 그동안 없었던 현장체험학습 얘기가 나오는 듯했다. 학년 부장이 말을 이어 갔다.
"교육과정부 쪽에서 확보한 예산이 있는데, 코로나도 수그러들었고 예산도 써야 하고 하니, 현장체험학습을 추진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무실 한 편에서 8반 담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말고사 끝나면 12월 말인데, 그렇게 추울 때 체험학습을 가는 게 크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는 막 환갑이 지난, 2학년부 최고령이자 학교 최고령 교사였다. 그의 나이 정도 되면 담임을 맡지 않아도 될 터인데, 들리는 말로는 담임을 자원했단다. 그 말을 듣고 최초로 내 머리에 떠오른 말은 '왜 굳이?'였다.
고등학교 담임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바빴다. 체력도 꽤 필요로 했다. 8반 담임은 담임 반 학생들에게 그리 열정적으로 대하지않는 듯했고 가끔 교무실에서 담임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담임이 반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하곤 했다. 나이에 비해 자기 앞가림은 곧잘 해서 다른 담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는 아닌 게 다행이었다. 그러니 8반 담임의 담임 자원 얘기를 듣고 내가 떠올린 '왜 굳이?'는 일견 타당한 의문이었다.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겠으나, 가야 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지시니까요."
학년 부장은 '지시'라는 말을 강조하려는 듯, '교장 선생님의'이라고 말한 뒤, 1초쯤 호흡을 가다듬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교장의 지시라지 않는가. 학교 생활이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교장의 의견을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걸로 게임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미 없는 교육활동을 왜 해야 하죠?"
8반 담임이 다시 말했다.
"만일 2학년부의 의견이, 그런 현장체험학습은 의미 없다는 쪽으로 모아지면, 교장을 설득해서라도 가지 말아야죠."
8반 담임의 말투에선 단호함이 묻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흡'하고 숨을 삼켰다. 학년 부장의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어떻게......해야 할까요?"
학년 부장은 좀 당황한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들을 향해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런 사태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슬쩍 다른 담임교사들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무렴 어때, 이기는 편이 내 편. 뭐 대략 이런 느낌을 풍기며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수결로 결정하시죠."
약간 쉰 듯하면서도 사람의 주목을 끄는 힘이 있는 목소리가 교무실의 적막을 깼다. 3반 담임이다.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은색 안경테를 낀, 40대 초반의 여선생님이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왠지 현진건의 소설에 나오는 B사감을 떠올렸다. 그만큼 깐깐해 보였다.
"그렇게 할까요?"
학년 부장이 담임들의 의견을 물었다. 8반 담임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한 몸짓을 보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수결로 결정하겠습니다. 기말고사 이후 현장체험학습에 반대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8반 담임의 손이 단호하게 올라갔다. 나도 손을 올리려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어떤 손의 나부낌도 감지되지 않았다. 나는 냉큼 손을 내렸다.
"네, 반대는 한 분이네요. 그럼 찬성하시는 분?"
학년 부장의 손이 거의 빛의 속도로 올라갔다. 뒤이어 1반 담임의 손이, 통통한 손등을 드러내 보이며 따라 올라갔다. 1반 담임은 사석에서 뿐만 아니라 교무실에서도 학년 부장을 '형'이라고 불렀다. 아주 스스럼없는 사이라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내가 보기에 1반 담임은 학년 부장을 추앙하는 듯했다. 교무실을 둘러보니 8반 담임과 나를 빼고, 모두 손을 들고 있었다. 현장체험학습을 이렇게 가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강렬하게 치밀어 올랐지만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 손이 어정쩡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찬성해 주셨습니다. 현장체험학습, 추진하겠습니다."
학년 부장의 말투에는 고마운 마음이 담뿍 담겨 있었다.
"교장 선생님한테 한 번만 더 재고를 요청해 주세요. 아무 말 안 한다고 찬성하는 건 아니잖아요?"
8반 담임이 답답한 심정을 툭툭 내뱉듯이 말했다.
"예, 아니, 뭐... 알겠습니다. 네, 네.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
학년 부장은 얼른 학년 회의를 끝내고 싶은 듯했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화장실이 급하다는 듯한 몸짓을 하며 교무실 문을 박차다시피 하며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8반 담임이 교장과 독대했고 교장은 다시 학년 부장을 교장실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틀 뒤, 다시 학년 회의가 열렸다.
"8반 담임 선생님이 추운 날 현장체험학습이 무의미하다고 반대하셔서, 교장 선생님과 다시 논의했습니다."
내가 몇몇 담임들에게 물어보니 애초의 현장체험학습은 실내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체험학습이냐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겨울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8반 담임은 그런 체험학습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말고사 이후 체험학습을 반대한 거라고...
학년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두에게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교장 선생님께서 학년부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유의미한 체험학습이 되도록 진로와 연계한 체험학습을 계획하라고 하셨습니다."
학년부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건, 8반 담임의 의미 없는 체험학습 무용론이 먹혔다는 얘기를 돌려 말한 것이니 그렇다 치는데 진로와 연계하라는 건 무슨 얘긴지 초임 교사인 나로선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국으로 가만있을밖에. 그러나 교무실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학년 부장이 자기가 세운 계획을 이야기하고 나머지 담임들이 그 계획을 추인하는 양상으로 거의 모든 학년부 일이 추진되는 걸 익히 본 터이라, 나에게 이런 분위기는 자뭇 익숙했다.
적막을 깬 건 8반 담임이었다. 학년 회의에서 발언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학년 부장, 업무 담당자 그리고 8반 담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축구의 정교한 세트 피스처럼 늘 약속된 플레이를 했다. 학년 부장이 대략적인 걸 이야기하면 업무 담당자가 세부 사항을 설명하고 8반 담임이 문제점이나 궁금한 사항을 말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업무 담당자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1반 담임이 체험학습 담당인데 그의 침묵이 교무실의 적막을 만든 것이다.
"진로 연계 체험학습, 좋습니다. 헌데 그 추운 겨울에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체험학습을 포기하고 다른 교육활동을 하면 안 되나요?"
학년 부장이 8반 담임의 말을 받았다.
"그것도 생각 안 한 건 아닙니다. 근데 대체할 만한 활동을 찾기 어렵고 또 예산이 체험학습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곤란합니다. 체험학습을 진로와 연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8반 담임의 목소리가 다시 또 들려왔다.
"대체 활동을 찾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요? 또 예산 문제는 행정실과 협의해서 예산 항목을 변경하면 돼..."
8반 담임의 말꼬리를 자르며 학년 부장이 이야기했다.
"대체 활동은 8반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저와 업무 담당자인 1반 담임 선생님이 찾아야 합니다. 또 행정실에 확인해 보니 지금은 예산 항목을 변경할 수 없답니다."
나는 대각선 방향으로 내 건너편에 앉아 있는 8반 담임을 쳐다보았다. 뭐라 할 말은 많은데 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도 자칫 잘못했다간 대체 교육활동을 찾는 일이 자기에게 떨어질까 봐 그러는 것이리라. 학년 부장은,
"저하고 1반 담임 선생님이 진로 연계 체험학습 계획을 잘 세워 보겠습니다. 계획이 짜이면 다시 학년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로 연계 체험학습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담임 선생님들의 양해와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학년 회의가 끝났다. 담임들은 각자 자기 할 일로 바쁜 듯했고, 8반 담임 역시 그 이후로 체험학습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진로 연계 체험학습이 이루어질지 자못 궁금했다. 학년 부장과 1반 담임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옆반 담임에게 체험학습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 같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 경험상 진로와 연계한 체험학습을 제대로 추진하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는 얘기를 했다. 체험학습까지 4주가 채 남지 않았고 학생들 기말고사도 끼어 있는데 뭘 할 수 있겠냐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시험 전 주 금요일, 학년 부장의 메시지가 왔다. 점심시간에 진로 연계 체험학습과 관련한 회의를 하겠다고 했다. 옆반 담임과 함께 서둘러 점심을 먹고 교무실로 향했다.
학년 부장이 담임들이 다 자리에 있는지 교무실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1반 담임 선생님과 정말 고생 고생해서 간신히 진로 연계 체험학습 계획을 세웠습니다."
학년 부장이 말을 하는 도중에 1반 담임이 프린트물 한 장씩을 담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개 메신저 붙임 파일로 전달하고 필요하면 각자 알아서 프린트하는 게 통상적인데, 좀 의외였다.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지 좀 의아해하며 프린트물을 대략 훑어보았다.
'엥? 이게 진로 연계 체험학습 계획이라고?'
라는 생각이 최초로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다른 담임들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8반 담임을 빼고는 모두 표정이 안온했다. 8반 담임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추측한다면,
'그러면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다.',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라고 말하는 듯했다.
학년 부장과 1반 담임이 고생 고생했다는, 진로 연계 체험학습의 대강은 이랬다.
2학년이 8개 반이니 8개의 진로 연계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걸로 돼 있었다. 요리, 캘리그래피, 방송 댄스, 요가, 서양 매듭, 창업 컨설팅, 목공예, 심리 상담 등. 또 반별로 하나의 체험 프로그램만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고 담임들의 제비뽑기로 반별 체험 프로그램을 선택하도록 계획이 돼 있었다.
'이건 뭐 진로 연계가 아니라 취미 연계라 해야겠네. 프로그램을 왜 반별로 동일하게 선택해야 하지? 담임 제비뽑기로 프로그램을 선택하라고?'
내 머릿속을 일순간 휘감은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가타부타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초임 교사인 내가 나설 상황도 아닌 듯한 데다 내 성격상 내 마음속 말을 꺼내지 못했다.
"촉박하게 추진하다 보니, 진로 연계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추진했다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학년 부장의 말속에는 당당함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어쩌겠냐는 심정도 엿보였다. 다른 담임들은 모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좋아하는지, 먼저 조사한 다음 제비뽑기를 하면 어떨까요?"
8반 담임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신지......"
학년 부장이 말을 받았다.
"반 아이들에게 선호하는 프로그램 순서를 물어본 다음, 담임들이 1번에서 8번까지 순번을 뽑아 각반이 체험할 프로그램을 정하잔 말입니다. 그래야 그나마 학생이 원하는 바를 아주 조금이라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8반 담임의 목소리에선 왠지 해탈의 느낌이 묻어 나왔다. 아니 체념의 느낌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얘기해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도저히 얻어낼 수 없다고 느끼는 듯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며, 학년 부장이 담임들에게 어떠냐고 묻자, 모두들 좋다고 했다. 담임들은 각자의 반으로 가, 학생들의 선호도를 조사한 다음, 다시 교무실로 와서 제비를 뽑았다. 나는 2번을 뽑았다. 1번을 뽑은 8반 담임이 요리 프로그램을 선택해, 우리 반 아이들이 제일 선호한 서양 매듭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반 한 아이가 교무실 문을 빼꼼 열더니,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복도로 나가니, 자기 진로 희망이 창업 관련 쪽인데, 진로 연계 체험학습에서 창업 컨설팅을 체험할 수는 없겠냐고 물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안 된다고 했다. 학급 단위로 체험학습을 운영하기로 했기 때문에 개인 희망에 따라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럼 그게 무슨 진로 연계 체험학습이냐고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학년 부장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촉박하게 추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으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는 취지로. 말이 자꾸 꼬였다. '어', '그', '있잖아'와 같은 말들을 평소보다 서너 배 더 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입술을 쑥 내밀고 교실로 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년 부장과 1반 담임이 고생 고생하여 계획한 진로 연계 체험학습을 갔다. 학교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아담한 건물에서 여덟 개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곳들을 다른 담임들과 함께 돌아다보니, 아이들은 강사들의 안내에 따라 나름 열심히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말 착하고 기특한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는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에게 어땠냐고 물으니, 대부분 괜찮았다고 한다. 물론 이게 뭐냐고 하는 아이도 가끔이 있었지만 대체로 만족하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문득, 내가 아이들에게 앙꼬 없는 찐빵을 먹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배라도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