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량 유연화 주간, 제대로 운영하면 참 좋을 텐데...
요즈음 고등학교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이를 ‘수업량 유연화 주간’이라고 부른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수업량 유연화를 통한 학교 자율교육과정 운영 주간’이라고 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말고사 이후 방학할 때까지의, 죽어 있는 시간을 살려보자는 것이다. 기말고사 끝나면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하여, 많은 교사들이 영화 보여주기, 한 학기 과정 복습하기 등으로 대충 시간을 보냈었다. 간혹 아이들을 윽박지르며 수업을 강행한 교사도 물론 있었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수업량 유연화 어쩌고저쩌고’가 등장했다. 대강을 말하면, 기말고사 이후 시간에 모든 교사들이 새로운 강좌를 하나 개설하고, 학생들의 수강 신청을 받아 그 강좌를 운영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강좌 운영 형태에는 크게 ‘교과 융합형’, ‘교과 심화형’, ‘교과 보충형’의 세 가지가 있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교과 융합형’을 권장하고 있다. 문제는 말이 권장이지 반강제라는 데 있다. 어떤 교사가 ‘교과 심화형’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했더니, 수업량 유연화 업무 담당 교사가 득달같이 전화를 해서 웬만하면 ‘교과 융합형’ 강좌를 개설해 달라고 했단다. 담당 교사가 그러니, 전화를 받은 교사는 어쩔 수 없이 그러겠노라고 했단다. 문학 담당인 그 교사는 중국어 담당 교사와 함께 융합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단다. 중국어와 우리 문학의 융합인 것이다.
그래서 개설한 ‘교과 융합형’ 강좌명은 ‘한시 이해하고 창작하기’였다. 이 강좌가 어떻게 운영될지 알 수는 없지만, 강좌명만 놓고 볼 때 교과 간 융합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가? 중국어 교과에서 ‘교과 심화형’ 강좌를 개설하여 운영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담당하는 국어 교사가 한시의 문학성을 어찌 알겠는가? 그 문학 담당 교사의 애초 생각대로 ‘교과 심화형’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또 다른 ‘교과 융합형’ 강좌명은 ‘영화 속 물리와 수학’이다. 수학 교과와 과학 교과의 융합 강좌이다. 역시 어떻게 강좌를 운영할지 알 수는 없으나, 강좌명만 보면 융합형 강좌로 보기 매우 힘들지 않은가? ‘수능 영어의 생물 이야기 심화 탐구’라는 영어 교과와 과학 교과의 융합 강좌도 거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강좌명만 보면 수능 영어 지문 중에서 생물을 주제로 한 지문을 찾아 거기에 대해 심화 탐구를 진행하려는 듯하다. 융합이라기보다는 결합에 가깝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터이지만, 내 생각에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 때문 아닐까 한다. 수업량 유연화 주간을 통해 학교자율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다가, 학교자율교육과정의 가장 바람직한 강좌 형태는 ‘교과 융합형’이라는 생각이 결합하여 교사들에게 ‘교과 융합형’ 강좌 운영을 강권해서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업량 유연화 주간을 운영할 때, 내부적으로 치열한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도 위와 같은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하려고 할 때, 그 프로젝트에 대한 내부 토론을 치열하게 거친다면 그 프로젝트가 더욱 내실 있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0년이 넘는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면, 어떤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논의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교육부나 교육청 차원에서 지침을 내리면 학교의 업무 담당자가 학교 관리자와 논의를 한 다음, 세부 시행계획을 세워 발표하고 계획대로 따라오라고 다그치게 일쑤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학생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계획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물론 ‘이렇게 좋은, 이렇게 학생을 위하는 멋진 계획을 반대하다니, 당신 교사 맞아?’라고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다. 관리자들의 눈초리가 그렇다. 그러면 그 계획에 참여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유독 학교에서만 벌어지지는 않은 것이리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관과 단체, 회사 등에서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니 말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직급이 높은 상급자의 생각에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아닌가. 학교에서도 학교장의 생각을 뒤집기는 거의 하늘의 별 따기와 비슷할 정도로 어렵다. 또 학교장 한마디면 지지부진하던 일이 척척 진척되기도 한다.
수업량 유연화 주간 이야기로 돌아가자. 기말고사 이후의 죽은 시간을 살리자는 명제에 반대할 교사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어떻게 살릴지가 관건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학생들 위할 수 있는데, 모두 군말 말고 따르시오.’라고 압박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실질적으로 기말고사 이후의 죽은 시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절대 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해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그 계획이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내부적으로 충분히 논의를 거쳐 시행한다면 좀 더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일이 진행될 수 있을 터이다.
수업량 유연화를 통한 학교자율교육과정 운영.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조금 숨을 죽이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추진한다면 분명 의미 있는 활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풍토가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