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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강 Oct 22. 2024

손녀딸과 함께하는 하루하루

<16>  2024. 10.  21.(월)

딸네 집에 도착해 보니, 손녀딸은 벌써 일어나 거실에서 혼자 놀고 있다. 밤에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새벽 네 시에 깨어 저렇게 놀고 있단다. 오늘따라 손녀딸은 아내와 나를 무척이나 반겼다. 너무 일찍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기분매우 좋은 듯했다.


  오늘은 아내가 서울 병원에 가는 날이다. 나 혼자 손녀딸의 등원과 하원을 책임져야 한다. 나 혼자 손녀딸을 등원시켜야 할 때, 제일 난감한 일은 손녀딸 머리 땋기이다. 늘 아내가 해 왔던 터라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 땋기는 애저녁에 포기하고 머리를 양 갈래로 묶기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손녀딸이 일찍부터 깨어 있는지라, 아내가 딸네 집을 나서기 전에 손녀딸 머리를 땋아 주었다. 나의 최대 난제가 의외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아내가 딸네 집을 나선 뒤, 아내가 준비해 놓고 간 손녀딸 아침을 먹였다. 일찍 일어나 배가 고팠는지, 아주 잘 먹는다. 호박죽을 다 먹고, 소고기 뭇국에 만 밥을 거의 다 먹고, 사과와 배가 섞인 접시 하나를 깨끗이 비웠다. 딸내미가 골라 놓고 간 옷을 입히는데, 왜 그리도 협조적이던지. 내가 양치질을 시키려고 하자, 자기가 하겠다며 칫솔을 내게서 낚아채 가더니,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칫솔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내가, "칫솔질 똑바로 해야지."라고 했더니 갑자기 폭주 기관차처럼 칫솔질을 해 댄다. 장난기가 제대로 발동했다. 이 요상한 칫솔질만 빼고, 등원 준비 과정 모두가 매끄러웠다. 할머니가 없으니, 할아버지한테 협조 잘해 주어야 한다고 한 말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 이럴 땐 정말 철이 다 든 아이 같다.


  차를 타러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녀딸이 윙크를 하며 깨발랄하게 논다. 그 귀여운 모습을 사진에 담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에 "아, 사진 찍었어야 했는데……."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지하층에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손녀딸이 지하 주차장으로 나가기 직전, 다시 윙크를 하며 자세를 잡더니 "그럼, 사진 찍어."라고 한다. 재빨리 사진 한 컷을 찍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나서자, 손녀딸이 먼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아내와 함께 등원시킬 때는 지하 주차장에서 가끔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오늘은 먼저 손을 내민다. 지하 주차장은 위험하니 할머니나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아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손녀딸이 이 할아버지를 참 많이 봐준다.


  기침이 심하고 콧물이 좀 있어, 등원하기 전에 소아과 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건물 3층에 있는 소아과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탔다. 손녀딸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한동안 부끄럽다며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지 않더니,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이제 인사를 곧잘 한다. 그 아주머니도 활짝 웃으며 "너, 몇 살이야?" 하면서 손녀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럴 땐 정말 기쁘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럴 땐 손녀딸이 실망하지나 않을까 조금 염려가 되기도 한다. 물론 손녀딸은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향했다. 처방전을 약사한테 건네고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녀딸이 약국을 한 바퀴 빙 돌며 "선물을 안 받았으니까, 뭘 살까?"라고 혼잣말로 종알거린다. 뭘 하나 사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그냥 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는지, '선물 안 받았'다는 제 나름 대로의 논리를 만들었나 보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가끔 자그마한 장난감 자동차를 선물로 주시는데, 오늘은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손녀딸이 이런 이야기를 한 듯하다. 뽀로로가 큼직하게 그려진 사탕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에, 사탕은 안 된다며 나나핑이 그려진 배칩을 사라고 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손녀딸이, "그래, 이거면 되겠다."라고 하면서 배칩 봉지를 받아 들었다. 끝까지 사탕을 사겠다고 고집을 피울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평화롭게 마무리가 잘 되었다.


  어린이집에 도착해 보니, 9시 58분이다. 손녀딸 협조 덕에 무사히 등원을 마쳤다.




  좀 일찍 손녀딸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나 혼자 손녀딸을 하원시켜야 해서 늦게 가면 주차장에 차를 댈 곳이 없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차 공간이 생길 때까지 어린이집 주변 도로를 빙빙 돌거나 근처 교회 차장에 주차를 해야 한다. 만약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손녀딸이 어린이집 로비 바닥에 오도카니 앉아 나를 기다려야만 한다. 난 그게 싫다. 그래서 나 혼자 손녀딸 하원을 맡게 되면 일찌거니 어린이집에 도착하여 차를 주차한 다음 주변을 산책하곤 한다.


  손녀딸이 나올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으로 가서 유리문을 통해 어린이집 로비를 들여다보았다. 곧 손녀딸이 나왔다. 나를 발견하곤 쪼르르 나한테 달려와 안긴다.


  어린이집 옆 붕어 놀이터에 가겠다고 해서 그리로 데려갔다. 미끄럼을 몇 번 타고 나와 술래잡기 놀이를 두어 번 하더니 갑자기 애착 인형 보노를 찾는다. 보노는 집에 있다고 했더니 빨리 집으로 가잔다. 보노가 자기를 기다린다며. 차 뒷좌석에 태우며 내 나름으로는 손녀딸을 달랜답시고 "보노가 집에서 씩씩하게 너를 기다릴 거야."라고 했더니 "아냐, 보노가 나를 기다리는 슬픔을 알아야 해."라고 한다. 손녀딸이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정도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약간 울듯 말듯한 표정이다.


  손녀딸이 울듯 말듯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다. 아마도 손녀딸은, 자기가 없으면 보노가 슬플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노가 '씩씩하게' 손녀딸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얘기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손녀딸에게 "그래 보노도 슬프게 기다릴 거야. 빨리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며 서둘러 딸네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손녀딸은 보노에게로 돌진했다. 그래도 그전에 욕실에서 손을 씻었다. 우리 손녀딸에게 보노는 무한한 위로를 건네주는 존재인가 보다.


  보노와 재회를 마친 손녀딸은 곧장 역할 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혼자 하기도 하고 나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있으면 손녀딸은 웬만해서는 나를 역할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다. 내가 역할 놀이를 잘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나뿐이다. 감지덕지하고 역할 놀이에 최선을 다해 본다.


  그러는 사이, 딸내미가 퇴근했다. 나도 이제 집으로 간다. 딸내미와 손녀딸이 배웅을 한다. 손녀딸은 아까 나와 약속한 대로, 내 볼에 뽀뽀를 해 준다. 약속을 지켜준 손녀딸, 기특하고 고맙다. 기분 좋은 퇴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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