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정기고사 문제지에 왜 저작권 관련 문구를 삽입하라고 했을까?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개 알고 있듯이 일반계 고등학에서는 일 년에 네 번 정기고사를 치른다. 고등학교 정기고사 성적은 대학 입시와 직결되므로 대부분의 교사들은 정기 고사 문제 출제에 심혈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2017년 경으로 기억하는데, 평가 담당 부서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시험지 말미에 꼭 삽입하라고 안내를 해 왔다.
이 시험 문제의 저작권은 ○○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이 안내를 받고 처음 든 생각은 '아니, 도대체 왜?'였다. 학교 밖에서 저작권 보호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가 왕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기는 했으나, 과연 고등학교 정기고사 문제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작권'이란 '창작물에 대하여 저작자가 행사하는 권리' 아니던가. 그러므로 정기 고사 문제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하려면 정기 고사 문제가 '창작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고등학교 정기 고사 문제는 창작물이어야 마땅하다. 시도 교육청에서 해마다 내려보내는 학업성적관리지침에도 정기 고사 문제를 출제할 때, 시중의 참고서나 모의고사의 문제를 전재나 복제하지 말라고 명토 박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침일 뿐이었다. 실제 출제 과정에서 이 지침은 가볍게 무시되곤 했다. 내 주위의 수많은 교사들이 참고서의 문제를 약간 변형하여 정기 고사 문제를 출제하곤 했다. 교사별로 어떤 참고서를 선호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학생들 사이에 공유되기도 했다.
평가 담당 부서에서 이런 실정을 모를 리 없는데 왜 이런 안내를 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담당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교육청 지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정기 고사 문제는 순전한 창작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이런 문구를 삽입해도 되냐고 다시 물었다. 그 담당자는 자기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며, 지시대로 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학교의 거의 모든 교사들은 평가 담당자의 이 안내에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이런 문구를 굳이 써넣어야 하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나는 그야말로 개 밥의 도토리 신세였다. 대부분의 학교 일이 이런 양태로 진행된다. 담당 부서에서 어떤 결정 사항(이는 교장의 추인을 받은 것으로 이 결정에는 교장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함)을 전파하면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따른다. 어떤 결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기대하기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나만 빼고 모두 그 문구를 삽입하여 정기 고사 문제지를 평가 담당 부서에 제출했다. 평가 담당자가 연락을 해 왔다. 그 문구를 넣어서 다시 시험 문제지를 제출해 달라고 했다. 교장, 교감 결재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얼마 뒤, 교감이 나를 불렀다. 그 문구를 삽입하는 게 뭐 그리 어렵나고 달래듯 말했다. 어렵지는 않으나 저작권 운운할 만큼의 창작물이 아니라 굳이 그 문구를 삽입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대답했다. 다른 교사들도 경우가 비슷할 텐데 다 그 문구를 삽입했으니, 나도 그 문구를 삽입해도 무방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다시, 저작권 운운할 정도의 창작물도 아니고 또 누가 내 시험 문제를 퍼 가져가서 활용하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그 문구를 삽입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이튿날 평가 담당 교사가 연락을 해 왔다. 교장, 교감 결재가 나지 않아 시험 문제지를 인쇄하지 못하고 있단다. 제발 그 문구를 삽입해서 시험 문제지를 다시 제출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어쩔 것인가. 그리 할 수밖에.
고등학교 정기 고사 문제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학생들의 성취 수준을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 좋은 문제가 출제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일 것이다. 요식 행위에 불과한 문구를 삽입했는지의 여부는 시험 문제의 질에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지 않겠는가. 30년 넘은 교직 생활 동안 정기 고사 시험 문제 결재 과정에서, 좋은 문제를 출제하였는지의 측면에서 시험 문제지를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언제나 앞서 말한 문구의 삽입 여부, 문제지에 쓰인 글씨체, 문제지의 쪽수 표시 방법 등과 같은 것만을 검토했다. 본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곁가지만 남아, 그 곁가지가 정말 중요한 것인 양 행세한 셈이다.
교직 생활 동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대개의 일들이 그러했다.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쭉정이만 남아 설쳤다. 학생들의 진로를 그리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진로 체험 학습', 연수를 빙자하여 직원 친목을 도모하는 '근무지 외 공동 연수', 연구 성과를 부풀리고 왜곡하는 '각종 연구학교 운영', 계획상으로만 그럴듯해 보이는 '수업 공개 제도', 백 번을 양보해도 전문적 학습이라 하기에는 낯 뜨거운 '전문적 학습 공동체'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제대로만 운영했으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텐데 보여 주기식으로만 운영되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상황은 내가 있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리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교사들의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본질과 핵심'을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진로 체험 학습'의 본질 또는 핵심은 '학생들의 진로' 아니겠는가. 그런데 학교에서는 '체험 학습'에 방점을 찍었다. 학생들 진로와의 연관성은 서류상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진로 체험 학습'은 그저 '소풍'에 불과하다. 현직에 있을 때 그런 형식적인 '진로 체험 학습'은 차라리 가지 말자고 했다가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한두 사람이 나서서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절대다수 교사들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교사들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와 정책이 고등학교에 도입되더라도 별무신통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