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손녀딸은 나를 천천히 늙게 한다
교직 생활을 마감할 시점이 점점 다가오자, 은퇴한 다음 무얼 하며 지낼지가 무척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은퇴 후의 삶을 미리미리 설계해 두라는 먼저 은퇴한 선배들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딱히 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가 은퇴 후 할 일 없이 빈둥빈둥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하는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 우울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데 막상 2024년 8월, 정년 퇴임을 하고 나자 빈둥거릴 틈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손녀딸을 돌보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손녀딸을 돌보기 위해 30년 넘게 산 땅을 떠나 도 경계를 넘어 이사를 했다. 딸과 사위의 직장이 멀어 딸네 부부는 6시 30분쯤에는 출근길에 나서야 했다. 그 시간까지 딸네 집에 가려면 우리 부부는 5시 20분에 일어나야 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6시 30분쯤 일어났는데 말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그래야 하니, 빈둥거릴 틈이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손녀딸 돌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다. 손녀딸을 돌보기 시작한 지난해 네 살이던 손녀딸은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또래에 비해 말이 빠른 편인 손녀딸은 다섯 살이 되자 말을 더욱 잘했다. 손녀딸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떤 때는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박장대소를 하기도 한다. '웃으면 젊어진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손녀딸이 하는 말과 행동을 듣고 보면서 파안대소할 때마다 젊어지지는 않더라도 늙어가는 속도는 더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이 퇴임한 한 지인은 딱히 할 일이 없어 하루하루가 심심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이라며 고속 노화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그 지인에게 손녀딸을 돌보며 생긴 여러 가지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지인도 분명 배시시 웃음이 나거나 포복절도하리라. 노화 속도도 좀 더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지난 금요일, 사위가 휴가여서 손녀딸을 돌보았기에 사흘 만에 손녀딸을 보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손녀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새록새록하다. 아내와 함께 딸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녀딸은 제 방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딸과 사위는 이내 출근하고 아내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손녀딸이 "할머니."하고 불렀다. 아내와 내가 후다닥 손녀딸에게 달려가 아내가 손녀딸을 꼬옥 안으며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라고 하자 손녀딸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제 할머니 목을 부둥켜안으며 "나도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라고 말했다.
며칠 만에 우리 부부를 보면 손녀딸은 꼭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너무 귀엽고 신통방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부가 손녀딸을 돌보는 보람을 한껏 느끼는 순간이다. 손녀딸을 돌보는 데서 오는 고달픔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진다.
#2.
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직전, 늘 손녀딸을 화장실에 보낸다. 쉬를 하고 어린이집에 가야 편안하게 놀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날도 쉬를 하라고 손녀딸을 화장실 변기 위에 앉혔다. 손녀딸은 쉬뿐만 아니라 응가도 했다. 나는 손뼉을 치면서 "우리 순돌이 응가는 냄새가 안 나네."라고 말했다. 냄새가 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손녀딸 밥에 비타민 가루를 섞어 먹이면서 '이거 먹으면 응가 냄새 안 나.'라고 말해 왔던 터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손녀딸 얼굴에 의기양양한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제 친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방귀 냄새가 심하다는 소문이 10단지를 넘어 9단지까지 퍼졌어." 손녀딸이 사는 데는 9단지이고 어린이집 친구인 ○○이는 10단지에 산다. 다섯 살배기 손녀딸 입에서 '소문이 어디를 넘어 어디까지 퍼졌다'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고 있는데 손녀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글쎄, ○○이 엄마가 ○○이 응가 뒤처리하러 갔다가 냄새 때문에 기절했대." 다섯 살짜리가 '응가 냄새 때문에 기절했대.'라는 말을 할 줄이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녀딸이 그런 표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정말 몹시 궁금하다.
#3.
'스틱 고구마'는 손녀딸이 좋아하는 과자 중 하나이다. 언젠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녀딸이 그 '스틱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며 참 맛나게도 먹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아유,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나도 먹고 싶네."라고 말할 정도였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손녀딸을 하원시켜 딸네 집으로 갔다. 딸내미가 퇴근하기 전이라 집에는 손녀딸과 나 둘뿐이었다. 손녀딸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출출한 모양이었다. 손녀딸의 최종 선택은 '스틱 고구마'였다. 봉지를 뜯더니, 손녀딸은 맛있게 그 '스틱 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앉아서 먹다가 서서 먹다가 돌아다니면서 먹다가 누워서 먹기도 했다. 하도 맛있게 먹길래 "할아버지도 좀 줘."라고 했다.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녀딸은 마지못해 '스틱 고구마' 한 개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한 개 가지고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 더 달라고 했다. 누워서 '스틱 고구마'를 먹고 있던 손녀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 먹어도 충분하잖아?" 이 말을 나에게 남긴 채 손녀딸은 남은 '스틱 고구마'를 몽땅 다 먹어 치웠다. 너무 맛있어서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무작정 '싫어.', '안 돼.'라고 하지 않고 손녀딸 나름대로 할아버지는 '하나만 먹어도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할아버지로서는 이 또한 너무 신통방통하고 예쁘기 그지없다. 여지없는 '손녀딸 바보' 입증이다.
이 밖에도 손녀딸과의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최소 하루에 한 번은 웃게 된다. 손녀딸을 돌보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손녀딸을 돌보면서 내 삶에서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내 삶은 늘 웃음과 함께하게 된다. 그러니 분명, 나는 손녀딸을 돌보면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