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사람이다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했다. 모두가 두루 알고 있듯, '가르치기'가 교사 본연의 일이다. 그러나 교사가 '가르치기'만 해서는 학교가 원활하게 굴러갈 수 없다. '가르치기' 이외에 학교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어떤 '업무'를 맡아야 한다. 물론 행정실 직원들과 교무 실무사들이 학교의 여러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교사가 맡아야만 효율이 높은 업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평가' 관련 업무이다. 평가 관련 업무를 맡은 사람을 흔히 '평가계'라고 부른다. 학교에서 치르는 정기 고사를 관장한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업무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같은 정기 고사 성적이 대학 진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니 말이다. 특히 학생부 교과 전형이나 학생부 종합 전형과 같은 수시 전형에서 정기 고사 성적은 실로 막강한 역할을 한다. 평가계의 업무 강도는 아주 센 편이라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이 맡는 업무 중, 3D 업종 중 하나로 분류되고 평가계 교사는 담임 교사를 맡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평가계 업무가 정기 고사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업무이다 보니, 평가계는 다른 교사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평가계를 맡느냐에 따라 그 요구의 수준과 강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학교 정기 시험에 적용되는 학업성적관리지침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평가계가 학업성적관리지침의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요구 수준과 강도가 들쭉날쭉해지는 것이다. 평가계의 요구가 학업성적관리지침에 근거한 것이라면, 논쟁의 소지는 있더라도 받아들여야 마땅하리라. 그런데 어떤 평가계는 학업성적관리지침에 나와 있지도 않은 여러 가지를 요구해 다른 교사들을 힘들게 하곤 했다.
놀라운 점은 학업성적관리지침에 근거하지 않은 요구를 하는 평가계가 그렇지 않은 평가계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관행을 들먹였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내세웠다. 그 평가계들이 요구한 사항들을 알게 되면 헛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또 본질과는 한참 동떨어진 지엽말단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학교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이라 심히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을 학교 현장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겪은 일 몇 가지를 밝히겠다.
2021년의 일이니 그리 오랜 일도 아니다. 중간고사 시험 문제지를 평가계에게 제출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사무실에서 쉬고 있었다. 평가계가 사무실 문을 들어왔다. 내가 제출한 시험 문제지를 들고 있었다. 평가계가 처음 한 말은 시험 문제지의 글씨체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보낸 시험 문제지 양식의 글씨체와 다르다고 했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굳이 그래야 되냐고 되물었다. 그 평가계는 시험지 양식을 통일해야 한다고 했다. 평가계가 보내준 시험지 양식과 글씨체만 다를 뿐이었다. 꼭 글씨체까지 통일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보기 좋지 않겠냔다. 누가 보기에 좋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평가 담당 부장 교사와 교감에게 얘기했더니, 평가계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러는 것이니 평가계의 요구를 들어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 아니냐고 하면서. 물론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글씨체가 시험 문제의 본질은 아닐 텐데 왜 그리 그 문제에 집착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나 더 얘기해 보자.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다. 또 앞서 이야기한 그해의 일도 아니다. 2020년의 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험의 본질과 관계없는 지엽발단적인 데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시험 문제지의 각 문항에, 그 문항이 몇 점짜리인지를 표시하게 되어 있다. 어떤 교사가 늘 하던 대로 '<3점>'이라고 배점 표시를 한 시험 문제지를 제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뀐 평가계한테서 메시지가 왔다고 한다. '<3점>'을 '[3점]'으로 고쳐서 문제지를 다시 제출해 달라고. 그 교사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며 고치지 않겠다고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랬더니 평가계가 직접 찾아와서 수정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수정해서 제출했다고 하면서,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학교 현장에는 이처럼 본질과 한참 동떨어진 지엽말단적인 데에 집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본질에 충실한 다음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런데 본말이 전도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았다. 평가계 업무의 본질은 시험 문제가 제대로 출제되었는지 살피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학업성적관리지침에 나와 있는 규정과 절차를 준수해 시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교육청마다 차이가 있을 텐데, 내가 근무한 지역의 경우 시험 문제를 출제한 교사들 간에 검토를 한 다음 학업성적관리위원회에서 살펴보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 시험 문제의 질이 높아질 테니 말이다. 평가계라면 마땅히 이 절차를 준수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터이다. 그런데 그런 평가계는 정말 가물에 콩 나듯 했다.
30년 넘는 교직 생활 동안 그런 평가계를 딱 한 번 만났다. 평가계가 보내오는 메시지가 사뭇 달랐다. 글씨체나 배점 표시와 같은 지엽말단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를 강조하지 않았다. 출제 교사들끼리 시험 문제에 대해 논의할 시간을 확보해 주었고 학업성적관리위원회의 시험 문제 검토 일정을 지속적으로 안내하는 등 시험 문제의 질을 높이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시험 문제의 질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시험이 끝난 뒤 학생들의 이의 제기는 현저하게 줄었다. 시내 학원들도 시험 문제의 질이 갑자기 좋아졌다며 놀라워했다.
달라진 건 사람뿐이었다. 시험에 관한 체계가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 하나가 어떤 상황이나 체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는 지엽말단적인 것에 집착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생각이 중요하다. 자신이 담당한 업무의 본질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뭘 해야 할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학교 현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바뀌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