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반장 선거의 추억
2021년 우리 나이로 예순 되던 해에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자원했다. 평생 근무했던 지방 소도시 지역에서 근무 학교를 옮긴 해였다. 지방 소도시라고는 해도 내가 옮겨간 학교는 대학 진학에 일로매진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인지라 나이 예순에 담임을 맡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 학교 교감이 나와 동갑이었는데 그 교감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를 말렸다. 내 나이에 걸맞은 적당한 업무를 맡길 테니 담임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기어코 담임을 맡았다.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담임 발표가 있던 새 학기 개학 날. 아홉 명의 2학년 담임과 2학년 학년 부장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섰다.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 앞에 서니, 내 나이가 도드라져 보였다. 내가 육십 대고 사십 대가 한 명, 나머지 사람들은 삼십 대 초중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를 처음 본 우리 반 학생들의 표정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담임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늙수그레한 담임을 만나게 된 학생들의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학생들의 걱정과 염려를 불식시켜야 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괜찮을 듯싶었다. 개학하고 나서 학급에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반장 선출이다. 담당 부서에서 꽤 재촉을 한다. 대개 개학 후 2주 안에 반장 선출을 끝내도록 요구한다. 어떤 담임교사들은 개학한 그 주에 반장 선출을 끝내기도 했다. 개학 다음날 후보자 등록을 받고 그 주 금요일에 반장 선거를 해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반장 선거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담임교사는 거의 없었다. 최소한 내 주변에서는 말이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반장 선거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걸 물어보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빨리 뽑지 말고 어느 정도 시간을 갖고 반장을 뽑자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제대로 된 절차를 지켜 반장을 뽑자고 제안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그러면 선거관리위원회를 만들어 반장 선거를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동의하여 세 명의 선거 관리 위원을 뽑아 반장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담임인 내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반장 선기 기일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다. 담당 부서 부장 교사와 논의하니 아무리 늦어도 2주 후까지는 마무리를 해 달라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하며 최대한 미루어 달라고 해서 1주의 말미를 더 얻었다. 선거 관리 위원들을 불러 모아 반장 선출 기한을 알려 주고 우리 반 반장 선거를 어떻게 진행할지 계획해 보라고 했다. 담임은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학급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계획을 잘 짜 보라고 당부했다.
담임이 나서지 않고 학생들에게 반장 선거를 온새미로 맡긴 그해, 우리 반의 반장 선거 양상은 다른 반과 사뭇 달랐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선거 계획을 꼼꼼히 잘 잤다. 후보 등록 기간, 후보 유세 시간과 방법, 후보 포스터 게시 방법, 투표지 양식 도안 등등 물샐틈없는 계획을 세웠다.
반장 후보와 부반장 후보가 각각 세 명이 나왔다. 다른 반의 경우와 비교하면 후보가 난립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후보로 나서는 학생이 없어 곤란을 겪는 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진행되는 후보 유세를 들으려고 기웃대는 다른 반 학생들도 있었다. 또 창문에 붙여 놓은 후보 포스터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학생들도 많았다. 학생 회장 선거도 아닌데 포스터까지 붙였다는 사실이 좀 의외인 모양이었다. 교사들 중에는 반장 선거에 그리 호들갑 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내가 교직 생활에서 마지막 담임을 한 그해, 우리 반 반장 선거는 그 학교에서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반 학생들이 매우 즐거워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반장 선거는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담임인 내가 한 일은, 선거 관리 위원들이 부탁한 투표용지를 인쇄한 다음 선거관리위원장 도장을 찍는 난에 내 도장을 찍어준 것뿐이었다.
축제처럼 반장 선거가 끝났다. 반장이 된 학생은, 내 교직 생활을 통틀어, 학생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부여받은 반장이 되었다. 담임이 반장 선거에 개입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반장 선거를 맡겼을 뿐이었는데 그 후과는 놀랄 만했다. 좀 더 일찍 하지 못하고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을 한 해가 되어서야 이런 반장 선거를 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쉬운 점이 또 하나 있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그렇게 즐겁게 우리 반 학생들이 반장 선거를 진행하는데 그 어떤 다른 반도 우리 반을 따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어떤 담임교사도 우리 반의 반장 선거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성처럼, 담임교사가 주도하여 개학 일주일 만에 후딱 반장을 선출하고 말았다. 반장 선거는 학생들에게 민주적 선거의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담임교사가 주도하여 개학 일주일 만에 후딱 반장을 뽑고 있을 듯하여,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