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꼬마 아이에게 배운 것
지난 목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다섯 살배기 손녀딸 하원을 위해 엘리베이터 하강 단추를 눌렀다. 오후 3시 30분쯤이다. 14층에서 하강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한 꼬마 아이가 휴대폰으로 열심히 게임을 하다 내게 슬쩍 눈인사를 건네고 다시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다. 학원에 가는 길인 듯했다. 주황색 학원 가방을 메고 있었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유모차가 안으로 들어왔다. '쪽쪽이'를 입에 문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그 순간 그 꼬마 아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아이는 아주 작은 소리로, 거의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왜 그러느냐고 물은 모양이었다. 꼬마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아주 작게 말해야 해요. 아기가 자고 있거든요."
아기 엄마 얼굴에 아침 햇살 번지듯 미소가 퍼져 나갔다. 내 얼굴에도 아기 엄마의 미소를 꼭 닮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서 '저 어린 꼬마 아이가 어떻게 저런 배려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배려심을 타고났을지, 부모의 지속적인 교육으로 배려심을 갖게 되었을지 정말 몹시도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성품이 '배려심'이라고 어떤 학자가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학자의 분석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행동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내가 하는 행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 엘리베이터가 중간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는데 그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을 경우 나는 습관적으로 '닫힘' 단추를 누르곤 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면 '열림' 단추를 누르고 사람이 타는지를 살피거나 최소한 '닫힘' 단추를 누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 내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니라.
내 주변 사람들을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배려심이 아주 많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막 돼 먹은 사람들은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오히려 평균적 한국인보다 도덕적 관념이 좀 더 높다고 해도 될 만한 사람들이다. 쓰레기 분리수거, 교통 신호 준수 등의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 끝에 놀라운 배려심을 보여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꼬마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그런 배려심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30년 넘는 내 고등학교 교직 생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배려심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3년을 떠올려 보라. 다른 학생을 배려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기본 바탕은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학생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3년 동안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제 아무리 배려심이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그 배려심은 시나브로 없어지고 말지 않겠는가.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내내 학생들의 경쟁을 부추겼다. 열심히 공부해서 다른 학생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명문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학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우리 주변에 공기가 있지만 그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고등학교 실정도 내가 재직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종종 연락하는 후배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건대 그러하다. 다른 학생들을 배려하라는 가르침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형편이니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배려심 많은 꼬마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여전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우리 사회는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한다. 실패한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충만한 사회라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터이다. 배려가 충만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해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따뜻한 배려를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등학교에서 '배려'를 가르쳐야 한다. 다른 학생을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성적이라는 잣대로 학생들을 줄 세우기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성적을 얻어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며 학생들을 경쟁 속으로 욱여넣지 말아야 한다. 배려심 많은 아이가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그 배려심이 사라진다면 학교 교육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고등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려를 가르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할 터이다. 우선은 교사 개인이 배려하는 마음의 가치를 인식하고 학생들에게 배려의 중요성을 수시로 강조하면 좋겠다. 그러면서 배려심을 키울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배려심 많은 사람들로 충만한 우리 사회, 생각만 해도 흐뭇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