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시인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이 시집은 1978년과 1979년에 쓴 시들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40여 년 전의 시들이다. 시의 묘미가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쓴 지 40여 년이 지난 것들을 읽어도 어떤 것들로부터는 마음의 울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내 마음에 와닿은 시, 다섯 편이다.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에서 지을 죄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을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한 도랑을 따라
예감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속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 날>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안개는 우리 동네 집들을
가라앉혔다 아득한 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누군가를
불러냈고 누구일까, 누구일까 나무들은 설익은 열매를
자꾸 떨어뜨렸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서리 맞은
친구들은 우수수 떨어지며 결혼했지만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다 거리에는 흰 뼈가 드러난 손가락, 아직
깨꽃이 웃고 있을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불란서문화관
여직원은 우리에게 불친절했지만 불란서 사람만 보면
꼬리를 쳤고 꼬리 칠 때마다 내 꼬리도 따라 흔들렸다
왜 이래? 언제 마음 편할래?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와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가 땅 부치는 사람의 양식 절반을 합법적으로 강탈
했고 나는 미안했고 미안한 것만으로 나날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갈 때
젓가락만큼 자란 들국화는
내 코를 끌어당겨 죽음의 냄새를 뿜어댔지만
나는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게 삶이 아니므로,
아니므로 그해 가을이 남겨 놓은 우리는 서로 쳐다봤지
단단한 물건이었을 뿐이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도
다른 하늘이 덮치고 겹쳤다
이 조개껍질은 어떻게 산 위로 올라왔을까?
- 이성복,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
1978년 11월 나는 인생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시내
음식점 곰탕 국물에선 몇 마리의 파리가 건져졌고 안개 속을
지나가는 얼굴들, 몇 개씩 무리 지어 지워졌다 어떤 말도
뜻을 가질 만큼 분명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멘트 바닥을 가르는 햄머 소리 눈썹을 밀어붙인 눈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무용수의 팔······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왔을 때 새들은 침착하게 떨어져 내렸고 그 침묵도 비명도
아닌 순간의 뜨거움 1978년 11월 인생은 추수 끝난
갯밭의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울음이 끝난 뒤의 끈끈한
힘을 모아 나는 대답했다······ 뒤쳐진 철새의 날갯짓으로
- 이성복, <인 생 · 1978년 11월> -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메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가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 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성복,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1970년대 후반의 우울이 잔뜩 묻어 있는 시편들인데, 문득 '지금의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1970년 후반의 현실이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특히 시, <그 날>의 마지막 행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