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순수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구인회'를 결성하여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해방이 돼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기도 했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는데, 자진 월북으로 오인되어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출간조차 되지 못하다가 1987년 민주화 조치 이후 해금되어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정지용은 흔히 우리나라 현대시의 초석을 다진 시인으로 평가된다. 정지용 시 전집에서 여남은 편을 추려 보았다. 1920~40년대에 쓰인 시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 보시라. 정지용의 선구자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을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 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물은 땅에 스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 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 쉬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중얼거린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 하여라.
- 정지용, <발열(發熱)> -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 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1> -
얼굴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정지용, <호수 1> -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애를 쓴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라니 받쳐 들었다!
지구는 연잎인양 오므라들고......펴고......
- 정지용, <바다 9> -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름드리 큰솔이 베어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나!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란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란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 정지용, <장수산(長壽山) 1> -
햇살 피여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길경(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터
촉 촉 죽순 돋듯.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갈히여
양지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되어
흰 밥알을 쪼다.
- 정지용, <조찬(朝餐)> -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서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정지용, <비> -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정지용, <인동차(忍冬茶)> -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서러워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정지용, <춘설(春雪)>-
<정지용 시 전집>에서 지금 읽어도 가슴에 와닿을 만한 시들을 뽑아 보았다. 선별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런 현대적인 시를 썼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가히 우리나라 현대시의 초석을 다진 시인이라 하겠다. 가만가만 낭송해 보면, 시 읽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