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뮨태준 시집 <맨발>에서

by 꿈강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한가로운 일일 수도 있다. 이 바쁘고 각박한 세상에 지금 당장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시 읽기의 효용을 부르짖어 보아야 누군가의 마음에 의미 있는 울림으로 다가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지만 시 읽기를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시를 자주 접하고 자꾸자꾸 읽어 보야야 한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가끔씩이라도 시를 통해 기쁨을 느끼면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한 권의 시집에서 다섯 편씩을 골라 소개해 보려고 한다. 나직나직 여러 번 읊조리다 보면 반드시 자신의 가슴을 울리는 시를 만나게 되리라.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었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라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며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맨발> -


백담사 뜰 앞에 팥배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쌀 끝보다 작아진 팥배들이 나무에 맺혀 있었네

햇살에 그을리고 바람에 씻겨 쪼글쪼글해진 열매들

제 몸으로 빚은 열매가 파리하게 말라가는 걸 지켜보았을 나무


언젠가 나를 저리 그윽한 눈빛으로 아프게 바라보던 이 있었을까


팥배나무에 어룽거리며 지나가는 서러운 얼굴이 있었네

- 문태준, <팥배나무> -


저녁에

물결의 혀를 빌려 조금씩 고운 모래톱을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작은 섬을 바라본다

외부에서 보는 섬은

새뜰로 가는 길에 있던 돌비석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고

뒷마당에서 시득시득 말라가다 천천히 무너져내리는 나뭇동 같기고 한데

저녁에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 문태준, <저녁에 섬을 보다> -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문태준, <뻘 같은 그리움> -


시인이 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시어가 지니고 있는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시적 장치가 쓰였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시를 읽는 것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으로 족하다. 그저 시를 여러 번 읽어 보고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시가 있으면, 그 시를 몇 번 더 읽으면 될 일이다. 그래야 시 읽기가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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