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김수영 시 전집>에서

by 꿈강

김수영 시인은 흔히 참여 시인이라 불린다. 그의 시에 1950, 60년대 우리나라의 현실이 잘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어떤 경우는 지금의 시대 현실과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수영 시인은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시어의 조탁(彫琢)을 가급적 절제하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일상어로 시를 쓴 점 또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할 터이다. 그의 시를 만나보자.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김수영, <거미> -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詩)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니라

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 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 -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김수영, <눈> -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김수영, <폭포> -

*나타(懶惰): 나태(懶怠)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死靈)> -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김수영, <파밭 가에서> -

*조로: 물뿌리개의 비표준어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



루소의 민약론(民約論)을 다 정독하여도

집권당에 아부하지 말라는 말은 없는데

민주당이 제일인 세상에서는

민주당에 붙고

혁신당이 제일인 세상이 되면

혁신당에 붙으면 되지 않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제2공화국 이후의 정치의 철칙이 아니라고 하는가

여보게나 나이 사십을 어디로 먹었나

8·15를 6·25를 4·19를

뒈지지 않고 살아왔으면 알겠지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이 아니면

사람 따위는 기천 명쯤 죽여보아도 까딱도 없거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方法敍說)을 다 읽어보았지

아부에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만사에 여유가 있어야 하지만

위대한 개헌 헌법에 발을 맞추어 가자면

여유가 있어야지

불안을 불안으로 딴죽을 걸어서 퀘지게 할 수 있지

불안이람 놈 지게작대기보다도

더 간단하거든


베이컨의 신논리학(新論理學)을 읽어보게나

원자탄이나 유도탄은 너무 많아서

효과가 없으니까

인제는 다시 비수를 쓰는 법을 배우란 말일세

그렇게 되면 미·소보다는

일본, 스위스, 인도가 더 뻐젓하고

그보다도 한국, 월남, 대만은 No.1 country in the world

그런 나라에서 집권당이라면

얼마나 의젓한가

비수를 써

인제는 지졸랑 영원히 버리고 마음 놓고

비수를 써

거짓말이 아냐

비수란 놈 창조보다도 더 산뜻하거든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 김수영, <만시지탄은 있지만> -



폴리호(號) 태풍이 일기 시작하는 여름밤에

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

꼴이 우습다


하나 죽이고

둘 죽이고

넷 죽이고

…………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

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

-김수영, <거미잡이>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을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

- 김수영, <사랑> -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 다닌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 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 김수영, <현대식 교량> -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차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절망>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월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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