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기형도 전집>에서

by 꿈강

기형도 시인은 1989년 3월, 29세의 나이에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시인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일부 비평가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秘儀的)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작품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혀왔으며 이제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새로운 고전으로 우리 문단에 자리잡게 되었다.


기형도 시인의 시에 대한 윗글의 평가처럼, 기형도의 시는 이제 우리 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옥(珠玉) 같은 그의 작품을 감상해 보자. 마음에 쏙 드는 시가 있다면 암송해 봐도 좋으리라.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갯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친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아.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안개> -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을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 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 기형도, <흔해빠진 독서>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은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이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 기형도, <바람의 집>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든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닥타닥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 그대 단편(短篇)의 잠 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기형도, <바람은 그대 쪽으로> -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라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



그해엔 왜 그토록 엄청난 눈이 나리었는지,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수은주 밑으로 새파랗게 곤두박질치며 우르르 몰려가던 폭설.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왜 없어지는지 또한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지 못하였다. 한낮의 눈보라는 자꾸만 가난 주위로 뭉쳤지만 밤이면 공중 여기저기에 빛나는 얼음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어른들은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있는 힘 다해 높은음자리로 뛰어올라가고 그날 밤 삼촌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밤을 하얗게 새우며 생철 실로폰을 두드리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기형도, <삼촌의 죽음> -



너무 큰 등받이의자 깊숙이 오후, 가늘은 고드름 한 개 앉혀놓고 조그만 모빌처럼 흔들거리며, 아버지 또 어디로 도망치셨는지. 책상 위에 조용히 누워 눈뜨고 있는 커다란 물그림 가득 찬란한 햇빛의 손. 그 속의 나는 모든 것이 커 보이던 나이였다. 수수밥같이 침침한 마루 얇게 접히며, 학자풍 오후 나란히 짧은 세모잠. 가난한 아버지, 왜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낡은 커튼을 열면 양철 추녀 밑 저벅저벅 걸어오다 불현듯 멎는 눈의 발, 수염투성이 투명한 사십. 가난한 아버지, 왜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그림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물 묻은 손을 들어 눈부신 겨울 햇살을 차마 만지지 못하였다. 창문 밑에는 발자국 하나 없고 나뭇가지는 손이 베일 듯 사나운 은빛이었다.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

- 기형도, <너무 큰 등받이의자> -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 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 -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時着) 도착 시외버스로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기형도, <봄날은 간다> -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 앉아

채송화를 싹둑싹둑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남국 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 풀어 날렸다.

이쁜 달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신작로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메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 기형도, <달밤> -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기형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적막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공지(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 기형도, <388번 종점> -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 기형도, <노을> -



1

도로시. 그리운 이름. 그립기에 먼 이름. 도로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그 얕은 언덕과 어두운 헛간, 비가 내리던 방죽에서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그리운 유년(幼年)들. 네 빠른 발과 억센 손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헤치고 언제나 너를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주었지. 우리는 아무도 여자애 밑에서 졸병 노릇 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온 산나리꽃 덕분에 네가 내게 달아준 별 두 개의 계급장도 난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네 명령 밑에서는 즐겁고 가벼웠다. 네가 혼혈 소녀였던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용감한 도로시. 네가 고아원으로 떠나던 날의 그 이슬비를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 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지.


2

도로시. 먼 이름. 멀기에 그리운 이름. 도로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 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 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왜 그날도 이슬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마을 어귀에서 네가 보여준 그 표정, 도로시.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웃음이었을까. 그 후 우리는 재빨리 나이가 먹었고 쉽게 너를 잊었다. 도로시.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로시. 그리운 이름.

- 기형도, <도로시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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