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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염색비를 아껴준다

by 인생 탐험가


호주는 전 세계에서 피부암 발병률이 1위일 정도로 햇볕이 무척 뜨겁다. 길거리에 있는 자동차들을 보면 강한 태양광으로 인해 코팅이 벗겨진 차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햇볕이 워낙 뜨겁다 보니 호주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피부도 점점 까무잡잡하게 익어갔다. 피부색이 바뀌어서 안 좋은 점 하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파운데이션 호수와 실제 피부색이 맞지 않는다는 것. 결국엔 그 파운데이션을 바르면 당장 경극 무대로 올라가야 할 만큼 피부색의 차이가 커졌다. 호주에 온 이후로는 이전처럼 화장을 많이 하고 다니지 않긴 했지만, 비싸게 주고 산 파운데이션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이참에 아예 피부 화장은 포기해 버렸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는 게 편하고 좋긴 했지만, 얼굴의 결점을 고스란히 내놓고 다닌다는 게 못내 찜찜하긴 했다. 특히 가끔 외출이 있는 날이면 피부색에 맞지 않는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라야 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그런 날이면 앤디가 내 곁으로 와서 말해 주었다.

“지, 너는 화장하지 않아도 너무 예뻐.”

“그럴 리가. 아무래도 파운데이션을 하나 더 사야 할까 봐.”

“아니야 지금 피부색이 훨씬 건강하고 좋아 보여.”

객관적으로 나의 피부상태는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잡티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앤디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내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한 번은 우리가 서로의 과거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 날이 있었다. 사진 속 20대의 앤디는 긴 생머리였고, 반대로 나는 잔뜩 꼬불거리는 히피펌을 한 상태였다. 앤디는 본디 곱슬머리를 갖고 있는데, 20대 시절엔 이 곱슬머리가 싫어서 고데기로 머리를 펴고 다녔다고 했다.

“곱슬머리가 싫어서 머리를 폈다고? 난 그 머리를 30만 원이나 주고 했어!!”

“그러니까. 괜히 긴 생머리에 욕심을 내느라 시간 낭비했어. 지금은 내 곱슬머리가 좋아.”

앤디는 사진 속 꼬불거리는 나의 머리를 보며 흥미로워했다. 앤디가 보는 과거 사진 속 나는 곱슬머리, 생머리, 긴 머리, 짧은 머리, 갈색 머리 등등.. 다양한 스타일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나의 20대 사진 속 대부분의 나는 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점이었다.


나는 숯처럼 새까만 내 머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재미없고 답답해 보여서 싫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염색을 하며, 본디의 머리색이 자라나기가 무섭게 염색약으로 머리 전체를 덮어버렸다. 호주로 올 때는 자주 염색할 수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본래의 새까만 머리로 돌아갔던 상태였다. 나는 사진 속 나를 들여다보다가 투덜거렸다.

“앤디, 사실 이 사진 속 머리색은 다 가짜야. 진짜 내 머리 색은 지금의 이 색깔이야. 너무 까맣지 않니. 정말 답답해 보여.”

“아니야! 지금 머리색이 제일 잘 어울려. 머릿결도 부드럽고 반짝이기까지 하잖아. 이 색깔이 그 어떤 색보다 훨씬 잘 어울려. 절대 염색하지 마.”

고작 머리카락일 뿐임에도 앤디의 칭찬은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가장 긍정적인 시선에서 바라봐주는 앤디 덕분에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나의 새까만 머리색이 나와 정말로 어울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염색을 하지 않고 본래의 머리색을 유지하고 있다. 흰머리가 나서 새치염색을 하게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이 스타일을 유지하지 않을까 싶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도 하지만, 나의 염색 비용을 아껴주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의 내 모습을 사랑해 주는 앤디의 칭찬 굴레에서 내가 끝내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필터 카메라로 찍은 얼굴보다 실제 내 얼굴이 더 예쁘다는 것이다. 앤디와 함께 사진을 찍을 때면 앤디는 언제나 기본 카메라 렌즈만을 원했다. 나 역시 과한 필터 사용은 지양하지만 가볍게 얼굴의 잡티를 가려주는 정도의 필터는 종종 이용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앤디는 ‘원래의 얼굴이 더 예쁘다’고 하였지만, 앤디가 제 아무리 칭찬해 주어도 주름과 잡티가 생생히 보이는 사진 앞에선 나도 그녀에게 설득될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물을 때면 주로 사진을 주고받는다. 주름도 흰머리도 제법 많아진 지금의 나를 보고도 앤디는 여전히 칭찬부터 건넨다.

“지, 너는 한결 같이 예뻐. 너의 검은 머리도, 건강한 피부도 항상 아름다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난 항상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한 마디를 속으로 중얼거린다.


미안해 앤디. 사실 그 사진, 살짝 필터 씌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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