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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생충의 발견

by 인생 탐험가

말도 안 통하고 연고도 없는 곳에 무턱대고 짐 가방 하나 들고 와서 ‘살겠다’라고 결심한 나는 이미 호주 생활에 익숙한 앤디에게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앤디 역시 내가 그녀의 집에 지내기 시작할 때쯤 직장을 잃고 삶에 고군분투하던 시기라, 우리는 자매처럼 서로를 보듬으며 지냈다. 아버지 어머니도 다르고 국적마저 달랐지만 말이다.


특히 돈과 비자 때문에 앤디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급기야는 남자친구인 스캇까지 앤디의 속을 썩였다. 스캇 때문에 힘든 날이면 앤디는 그와 관련한 문제와 감정을 나에게 토로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스캇의 태도는 변했고, 급기야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까지 했기 때문이다. 앤디는 극도로 힘들어했고, 곁에서 매일 그녀를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언성을 높이면, 방 안에 꽁꽁 숨어 있어도 내가 그 싸움의 당사자인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았다. 앤디의 감정을 너무 잘 알기에, 마치 내가 실시간으로 이별을 겪는 듯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의 다툼이 잦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의 싸움은 평소보다 훨씬 심각했다. 밖에서는 스캇이 짐을 싸는 소리가 들려왔다. 앤디도 그에게 당장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혼자 방 안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숨죽이고 있었다.

“똑똑- ”

그때 누군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스캇이었다. 집을 나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건가 싶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스캇, 너희 싸우는 소리 들었어. 너 이제 떠나는 거지?”

나는 나름 서양식 인사랍시고 그를 살짝 안으며 토닥였다.

“그동안 반가웠어. 스캇, 부디 건강히 지내길 바래.”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는 나의 짧은 포옹이 끝나자마자 스캇이 말했다.

“지, 네가 지금 먹고 있는 그 와인 컵 말이야... 그거 내 거야. 지금 당장 돌려줄래?”

나는 순간 멍했지만, 이내 와인을 원샷으로 비우고 빈 잔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내 방문을 두드린 이유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컵을 수거해 가기 위함이었다. 이런, 컵 하나까지 챙겨가는 야무진 인간 같으니라고.


스캇이 떠나고 그날 밤, 앤디는 내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겨우 말라갈 때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지, 근데 말이야... 냉동실에 있는 네 매그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비건용 아이스크림이 아니라서 그동안은 앤디가 손도 안 대던 것이었다. 나는 당장에 냉동실에서 매그넘 클래식 맛을 꺼내주었고, 앤디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해치웠다. 비건 남자친구와 헤어지자마자 일반 아이스크림부터 찾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동안 앤디가 얼마나 많은 걸 참아왔는지가 느껴져 웃기면서도 짠했다.


며칠 후, 우리 집에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스캇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혹시 사과하려고? 꽃이라도 가져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절반쯤 맞았다. 그는 사과하러 왔지만, 손에 들려 있던 건 꽃다발이 아니라 잘리지 않은 커다란 통밀빵 한 덩이였다. 문간에 선 스캇은 내 어깨너머로 앤디를 발견하더니, 그녀에게 대화를 청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달링! 우리 얘기 좀 해! 근데 말이야, 얘기하기 전에 이 빵 좀 썰게 칼 하고 도마 좀 빌릴 수 있을까?”

마음씨 좋은 앤디는 그가 부엌에서 빵을 썰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스캇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앤디, 겨울이라 밖에서 샤워하기가 너무 추워. 일주일에 두 번만 여기서 샤워하면 안 될까? 돈은 낼게. 일주일에 10불.”


그날 이후, 앤디와 나는 그를 ‘기생충씨’라고 불렀다. 그의 몸속에 기생충이 살아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짓이 기생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앤디는 지금도 도대체 그런 놈이랑 왜 더 빨리 헤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놈과 더 빨리 헤어지라고 앤디를 설득시키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남의 연애에는 간섭하지 않는 게 맞다지만, 그 대상이 ‘정말 아닌 놈’이라면 그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라도 말리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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