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앤디가 함께 살게 된 뒤에도 그녀의 에어비앤비에는 이따금 손님들이 찾아왔다. 특히 내가 그곳에 머물던 시기는 코로나 봉쇄가 한창이던 때라, 앤디는 더 이상 세일링 보트 일을 할 수 없었고 에어비앤비 운영이 사실상 그녀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방이 두 칸뿐이라 손님이 오면 앤디는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래서 손님은 늘 1인 여행객뿐이었고, 찾아오는 이들 또한 대부분 혼자 조용히 쉬러 온 사람들이었다.
여행지에서 홀로 지내는 사람들은 새로운 만남에 흔쾌히 마음을 열기 마련이라, 나와 앤디는 종종 그들과 '기간제 가족' 혹은 '임시 친구'가 되곤 했다. 예전에 헬마를 만나 짧은 시간 동안 좋은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20대 중반의 청년 데미안이다. 코로나 봉쇄가 길어지자 그는 재택근무지를 골드코스트로 정하고, 서핑도 함께 즐길 요량으로 일주일가량 우리 집을 예약했다. 마침 그 무렵 앤디는 스캇과 함께 캠핑밴을 타고 여행을 떠났고, 나는 졸지에 낯선 남자 손님과 단둘이 집을 공유하게 되었다. 일주일 뿐이라지만,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와 함께 지낸다는 건 솔직히 조금 불편했고, 심지어는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데미안은 예의 바르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손님이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불편한 기색을 전혀 느낀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낮에는 일하고, 아침이나 오후에는 그가 좋아하는 서핑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서핑하기엔 파도가 약한, 참 이름값을 못 하는 동네였다. 게다가 잦은 비로 날씨까지 좋지 않아 결국 데미안은 서핑을 거의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일을 마치면 주로 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베짱이 마냥 하는 일이 요리, 산책, 기타 연주가 전부였던 나도 늘 집에 붙어 있던 터라, 자연스레 데미안과 내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어느새 꽤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어리바리한 영어에 친구도 없이 매일 소파에서 기타나 쳐대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데미안이 나를 친구들 모임에 초대했다. 열 살은 어린 호주 mz 세대 모임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한국을 떠난 뒤로 소셜 모임을 가질 기회가 없던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데미안의 제안에 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은 그 자리를 ‘본격 원어민 듣기 평가’ 자리로 바꿔버렸고, 나는 그 누구의 말도 알아듣지 못 한 채 낙제 점수를 받아 들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잘한 게 있다면, 모두가 웃을 때 눈치껏 따라 웃으며 '알아들은 척' 연기력을 발휘했다는 정도랄까...
또 어느 날은 서핑이 취미인 데미안이 나에게 "동네 이름이 서퍼스 파라다이스인 곳에 살면서 서핑도 못 한다니!"라며 직접 서핑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다. 비 오는 추운 계절에 비키니 차림으로 서핑을 배우고 싶지 않아 그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호의는 정말 고마웠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며칠 후 앤디가 스캇과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둘이 떠난 여행에서 혼자가 되어 돌아왔다. 앤디가 여행지에서 스캇과 크게 싸우고 홀로 돌아온 것이다. 그날 밤, 앤디는 울분을 토하며 우리에게 사연을 털어놓았고, 나와 데미안은 새벽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앤디를 위로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앤디와 나도 아직 몇 개월밖에 알지 못한 사이였고, 데미안은 고작 며칠 전 찾아온 손님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날만큼은 우리 셋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서로의 연애사를 공유하며 조언을 건네고, 각자의 시행착오를 털어놓았다. 이후 며칠 동안 우리는 작은 가족처럼 지냈다.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나누어 먹기도 했고, 나는 주특기인 김밥을 말아 대접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 "외국인에게 김밥"은 실패 없는 메뉴였다.
어느새 ‘기간제 친구’를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데미안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에게 감사한 건 오히려 나였다. 친절하고 따뜻한 데미안 덕분에 에어비앤비 호스트 체험기는 기분 좋은 추억으로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를 잊을 만할 때 즈음, 뜻밖의 문자가 도착했다.
"지, 도대체 김밥 레시피의 비밀은 뭐야?"
함께 첨부된 사진 속에는 옆구리가 터지고 밥알이 사방팔방 흩어진, 해체 직전의 김밥이 있었다. 데미안이 혼자 김밥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처참히 실패한 모양이었다. 나는 폭소를 터뜨리며 친절히 답장을 보냈다.
"밥은 찰기 있는 미디엄 그레인으로 써야 해."
나는 나만의 김밥 레시피를 정성껏 적어 그에게 보내주었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결코 겪지 못했을 경험이었다. 낯선 이들이 민박집의 호스트와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앉아, 잠깐이지만 웃고 떠들며 만들어간 추억들. 앤디가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작은 선물과도 같은 시간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간 우리 집에 찾아온 이들과의 시간은 나에게 소중했다. 그들도 우리 집에서 보냈던 시간을, 그리고 나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김밥 잘 말아주는 베짱이 누나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