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타칭 히피 바이브가 가득한 스캇은 유제품류와 생선류까지 모두 먹지 않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채식주의자였는데, 심지어 채소도 유기농만 먹을 정도로 꽤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기농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닌지, 그는 과거 씻지 않은 유기농 채소를 먹다가 기생충에 감염되었고, 구충제나 약도 거부한 채 자연 치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바짝 마른 몸에 늘 배가 고프다며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 이유가 바로 그 기생충들 때문이었다.
슬림한 그의 몸이 사실은 기생충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1980년대도 아닌 무려 2020년대에 기생충 감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괜히 불안해져 “이럴 땐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하며 고기반찬 위주의 식탁을 꾸리기 시작한 나. 반면 앤디는 평소부터 시도해보고 싶어 하던 채식주의를 본격적으로 실천하기로 마음먹었고, 곧 우유 한 방울조차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비건 식생활에 돌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비건 커플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룸메이트를 구할 때 채식주의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육식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걸 꺼려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구울 때마다 괜히 신경을 썼고, 앤디는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러나 스캇이 내가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한 조리도구는 사용조차 안 한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로는 마음 편히 집에서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내가 스팸을 굽고 있을 때 스캇이 냄새를 맡고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헤이, 지! 너 스팸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고나 먹는 거야?”
“뭐 대충 알아. 고기 중에서 가장 최악의 부위로만 만든 거겠지. 하지만 맛있고 간편하잖아.”
저품질의 고기를 다져 만든 햄 따위를 먹는 나에게 스캇은 동물 사육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며 ‘고기를 먹어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한 교육을 했다. 충격적인 영상을 본 탓에 실제로 일주일간은 고기 생각이 뚝 끊겼지만, 다큐멘터리의 잔상이 희미해진 뒤 나는 다시 육식으로 돌아갔다. 나는 채식주의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후 나는 두 사람이 집을 비울 때에만 부리나케 고기 요리를 해 먹곤 했다. 깻잎 위에 명이나물과 삼겹살을 둘러 얹고 쌈장까지 듬뿍 바른 고기쌈의 맛.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사 먹던 시절처럼 들키지 않고 몰래 먹는 삼겹살의 맛은 짜릿했다. 스팸도 맛있게 먹는 나였으니, 제 맛으로 구워낸 삼겹살이야 얼마나 황홀했겠는가.
사실 내가 서럽고 아쉬웠던 건 단순히 비건 커플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육식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함께 밥을 즐길 수 있는 식사 메이트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내가 만드는 한식을 좋아하며 언제나 선뜻 도전하던 앤디였는데, 비건 선언 이후로는 내가 끓인 미역국도 소고기가 조금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국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예전에는 과자나 아이스크림도 잘 나눠 먹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앤디는 스캇과 함께 비건용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빼곤 그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먹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을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빠져있던 어느 날, 나는 맛있는 고기 요리가 먹고 싶어졌다. 무슨 고기 요리를 먹을까 고민하며 혼자서 식당가를 서성이던 중 ‘페르시안 레스토랑’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앞에 세워진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예쁘고 친절한 종업원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페르시안 음식이 뭐예요?”
“페르시안 음식은 이란 음식을 말하는 거예요. 여기는 이란식 케밥(불에 구운 고기 또는 채소)을 하는 집이에요.”
이란식 바비큐인 케밥을 소개하는 종업원의 친절한 설명에 이끌려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애매한 오후 네 시, 식당은 한산했다.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몰라 메뉴판만 한참 들여다보던 나를 눈치챘는지 종업원이 다가와 추천을 해주었고, 나는 그대로 주문을 넣었다.
직접 밥을 지어먹는 생활이 길어지며 ‘남이 차려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깨달아가던 시기에 ‘처음 맛보는 고기 요리’를 접하니 그 맛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모른다. 넓은 식당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우적우적 고기를 뜯는 나를 보고 종업원은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가 있어요. 루프탑에 사는 왕자 이야기예요...!”
그녀가 언급한 루프탑 왕자는 <옥탑방 왕세자>라는 한국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생각지 못 한 한국 드라마가 튀어나오자 반가움이 더해졌고, 나는 그녀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주에선 얼마나 살았는지, 왜 오게 되었는지 등등... 그녀는 이란에서 온 20대 후반의 여성 파티마였다. 이란에서 ‘파티마’라는 이름은 한국에서의 ‘지영’에 견줄 정도로 흔한 이름이다. 둘 다 흔한 이름을 가졌다는 작은 공통점으로 큰 공감을 나누던 우리는 결국 전화번호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만남을 계기로 나에게 고기 메이트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란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탓에 파티마는 호주에서도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어울리면서 결국 생애 첫 돼지고기 시식에 도전하였다. 한식당에서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 굽기 시작했을 때, 기름이 지글지글 튀고 고소한 냄새가 퍼지자 파티마는 용기를 내어 삼겹살 한 점을 입에 넣었고, 곧 입꼬리를 올리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코리안 바비큐는 정말 최고야!” 삼겹살을 좋아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웃음이 났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삼겹살, 치킨, 닭발 수프까지 함께 나누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고기를 못 먹는 친구 때문에 혼자 식당에 갔다가, 결국 함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될 줄이야. 앤디의 비건 도전은 나에게 뜻밖의 새 인연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새삼 인생은 참 예측할 수 없이 재미있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알 수 없는 세상살이에서 그나마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정 붙이는 데엔 밥 한 끼, 그것도 고기만 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나와 파티마는 고기를 매개로 인연을 키워 갔고,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