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코스트로 돌아온 내가 현지 생활에 점점 적응해 가는 동안, 앤디는 새 남자친구 스캇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스캇은 앤디의 이상형에 꼭 들어맞는 남자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보헤미안. 게다가 앤디가 오래 꿈꿔온 ‘캠핑 밴’에서 사는 삶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1년 내내 따뜻한 골드코스트에는 캠핑 밴에 사람들이 많았고, 앤디는 늘 자유로워 보이는 그들의 삶을 동경해 왔었는데, 마침 스캇이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손님처럼 드나들던 스캇이 어느새 우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나보다 길어질 정도가 되었다. 캠핑 밴 생활이 낭만적이라지만 불편함도 있었는지, 요리와 빨래, 샤워, 심지어 드라마 시청까지 모두 우리 집에서 해결하곤 했다. 어쩌다 하루 묵다 가던 것이 이삼 일이 되고, 이삼 일이 한두 달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우리 셋은 한 집의 식구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앤디와 함께 하기 위해 차리던 저녁도 어느새 ‘하는 김에 1인분 더 하지 뭐’라는 마음으로 한 접시를 더 차리다 보니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잦아졌다.
가끔 두 사람이 나를 그들의 데이트에 끼워주어 함께 숲이나 호숫가로 피크닉을 가기도 하였다.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과 그의 독특한 호주 억양 탓에 스캇과 나는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서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나름대로 잘 어울려 지냈다. 뜻밖에도 나는 이 새 식구와의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앤디가 스캇과 너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을 잘 믿고 애정을 아낌없이 쏟는 앤디는 그만큼 상처받기도 쉬운 사람이었다. 연애 방식에 있어 우리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는 스타일. 그나마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뿌리라도 안 뽑혔지, 우리는 어쩌면 뿌리마저 뽑아내 자진해서 장작더미가 되어줄 수도 있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살지 말자고 다짐한 적도 많았는데, 나는 어쩌면 이번에도 앤디가 그녀의 모든 것을 그에게 다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앤디 역시 이 관계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이상형과도 같은 남자를 만난 상황에서 제동을 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빠르게 달아 오른 관계였지만 앤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앤디는 스캇의 캠핑 밴을 타고 여행을 다니고, 그를 따라 ‘비건 라이프’에 도전하며, 그가 가진 좋은 습관과 새로운 생활 방식을 함께 익혀갔다. 스캇 덕분에 앤디가 활짝 웃는 날이 많아졌고, 곁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나 역시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 앤디는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지- 나 집을 떠나서 스캇과 함께 밴에서 살아볼까 해. 여행하듯 살아보는 것도 좋잖아.”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전하, 고정하시옵소서-’를 달고 사는 ‘우려 전문 충신’이었을 나는 단번에 앤디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앤디, 그건 신중해야 해. 잠시 여행하는 것과 매일 밴에서 사는 건 완전히 다를 거야.”
나는 형편없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설득했다.
“밴에서 살면 샤워는 어디서 어떻게 해. 대소변은 매번 공중 화장실에서 봐야 하잖아. 게다가 추울 때 더울 때는? 혹시라도 스캇과 싸우기라도 하면 어디서 지내야 하는 거야?”
나의 진심 어린 잔소리에 그녀는 한동안 망설였고, 결국 밴 라이프는 미루기로 했다. 특히 싸웠을 때 혹시라도 그가 혼자 밴을 타고 떠나버리면 어떡하냐는 나의 가정이 주효한 덕이었다. 대신 두 사람은 좀 더 본격적으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보기로 했다. 이미 스캇은 식구나 다름없었으니 생활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앤디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교통사고와도 같다. 예고 없이 찾아와 부딪쳐 놓고는 고통과 후유증을 남긴다. 그런 주제에 돈도 들고 신경도 써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만큼은 앤디의 사랑이 교통사고처럼 남지 않기를 바랐다. 빠르고 짜릿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마라톤처럼 천천히 체온을 올려가며 먼 길을 함께 하는 사랑이 되기를 바랐다. 앤디가 행복하기를, 스캇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아껴주기를 바랐다. 앤디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랑스러운 친구이니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저 한 발짝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대신 살아줄 순 없지만, 함께 웃어주고 때로는 걱정해 주는 일은 할 수 있으니까. 삶이 어디로 흘러가든,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