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에 펜 하나를 들고 내 얼굴을 그린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쌍꺼풀 없는 눈에 평범한 코와 입술을 그려 넣고, 약간의 특징을 주기 위해 짙고 까만 팔자 눈썹과 그에 평행을 이루는 팔자 주름을 그려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무난한 얼굴이고, 나쁘게 말하면 참 개성 없는 외모다. 이번에는 나의 특징을 구체화하기 위해 전체적인 스타일까지 넓게 들여다볼까. 그렇다면 애석하게도 오히려 ‘나’라는 사람의 특징을 잡아내는 게 훨씬 더 어려워진다. 검정 긴 머리(종종 단발)에 SPA 브랜드에서 팔 법한 기본 아이템들을 입혀둔 꼴이라, 내가 범죄자였다면 몽타주로 특정하기 굉장히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몽타주 화가라도.
내가 평범하고 개성이 희미한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언제나 자신만의 스타일과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 멋지고 부러웠다. 외모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서도 ‘이거 딱 내 스타일이야!’라고 할 만한 그 무언가가 나에겐 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좋아하는 음악도, 방 안의 분위기도 두서없이 들쭉날쭉한 것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나는 마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맵지도 싱겁지도 않은 그 중간의 미지근하고 맹숭맹숭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항상 개성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취향이라는 건 결국 스스로를 향한 확신과 선택의 집합인 거니까.
특징이 애매모호한 나와는 달리 앤디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특징으로 꽉 찬 사람이다. 풍성하게 곱슬진 흑발에 올리브색 눈동자, 완벽한 초승달 모양의 눈썹, 보헤미안 스타일의 장신구와 화려한 색채의 옷들까지. 같이 쇼핑을 가도 앤디가 입을 만한 스타일은 단 번에 척척 골라줄 수 있을 정도다.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 주로 몽환적이고 나른한 음악을 즐겨 듣고, 집안은 늘 인센스 향과 붉은 조명 빛으로 가득하다. 앤디는 어디 가서 나쁜 짓을 하고는 절대 살 수 없을 정도로 ‘특정하기 딱 좋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것 같은’ 내가, ‘내 맛은 내 맛이고 네 맛은 네 맛인’ 앤디와 함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에 점점 스며들게 되었다. 회색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앤디는 그녀의 뚜렷한 취향만큼이나 삶의 방식에서도 분명한 규칙과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 기상, 유기농으로 차린 삼시 세끼, 퇴근 후 해변가 산책. 해가 지면 점등하는 집안 곳곳의 촛불과 램프, 그리고 밤 10시의 취침까지. 게다가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집에 있을 때면 항상 행주와 빗자루로 이곳저곳을 쓸고 닦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바로바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대청소를 할 때면 침구도 빠짐없이 교체했다.
함께 살게 된 룸메이트가 정해둔 생활 규칙이 있다 보니 나도 그녀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안정감을 얻었다. 매일 나 자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 그때그때 청소를 하고, 상대방의 생활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일찍 자고 일어나는 생활을 하면서 말이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출퇴근과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핑계로 내 방 하나 제대로 치우지 않았고, 서른이 넘도록 엄마의 희생에 의존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평생을 얼마나 공주처럼 지내왔는지를 그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30대 중반, 타지에서 완벽한 타인과 살고 나서야 겨우 나의 나쁜 생활 습관들을 고쳐가기 시작하였다.
그런 면에서 여유롭고 건강한 앤디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그녀와 지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점차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햇볕과 해풍이 잘 드는 뒷마당에 널어 바짝 마른빨래, 직접 장을 봐온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나눠 먹는 저녁 시간, 나른한 오후에 기타 줄을 튕기며 부르던 몇 곡의 노래들. 사소한 풍경들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내 취향을 기를 여유도, 나 자신을 돌볼 마음도 없었던 내가 이제야 겨우 진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마주한 것이다.
아직은 여전히 무채색 같은 삶에서 작은 색 하나를 찾아냈을 뿐이지만, 그 한 가지 색이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언젠가는 나의 인생도 좀 더 뚜렷한 무지갯빛으로 물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제는 ‘미지근한 도시 여자’가 아니라, 조금쯤은 ‘미쳐 있는 도시 여자’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