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나 요즘 진짜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야.”
새로운 룸메이트가 생겼다는 앤디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내가 떠난 후 앤디는 잠시 또래의 여자 룸메이트와 살았으나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지않아 홍콩에서 온 20대 남자 대학생 케이가 앤디의 새로운 룸메이트로서 그 자리를 채웠다.
케이는 꽤 유복한 집에서 자란 청년처럼 보였다. 20대 나이에 호주에서 유학을 하고, 고급 중형차를 몰고 다녔으며 옷차림도 언제나 말끔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한 20대 남자가 집안일에 능숙하고 생활력이 강할 리는 만무할 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활 습관은 아직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요리를 한다고 주방을 어지른 후 청소와 설거지를 한참 미루거나, 샤워 후 욕실 바닥을 흥건히 적셔둔 채 태연히 나오는 것이 그 예이다. 이에 깔끔쟁이 앤디 입장에서는 매일 철부지 아들을 키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애를 하나 입양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앤디는 케이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케이, 요리한 건 바로 치워야 해. 욕실도 쓰고 나면 꼭 닦고 나오고.”
케이는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라고 대답했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앤디는 ‘왜 내가 이 애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를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그는 타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허둥대는, 아직 어린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앤디가 사진을 한 장 찍어 내게 보내왔다. 주방 한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촬영한 것이었고, 포스트잇엔 빼곡한 한자가 적혀 있었다.
“지, 혹시 이 글자들 읽을 수 있어? 케이가 붙여놓은 쪽지야.”
한자를 읽을 수 없어 번역기를 돌려보니 그 뜻은 이랬다.
“사람은 결국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그게 단순한 격언이었는지, 앤디를 향한 불만을 표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여전히 타협의 지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 너랑 지내던 게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는지 몰라.”
생활 습관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다 보니, 앤디는 나와 지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앤디와 함께 살 때, 나는 그녀의 규칙을 존중하고 잘 따라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이는 앤디의 방식을 따르는 게 아무래도 영 버거운 듯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나쁜 사람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사회생활의 기본을 배우지 못한, 그저 20대 어린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익숙하게 살아온 곳에서 배웠을 ‘어른으로서의 삶’을 그는 낯선 타지에서 홀로 익히고 있었으니, 모든 게 어리숙한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배려심이 부족한 순간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앤디는 나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지, 나 케이에게 우리 집에서 나가달라고 했어. 더 이상 그 애 엄마 노릇은 못 하겠어.”
앤디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이 났다. 어린아이 같은 그의 생활 습관이 고쳐지지 않자 앤디는 그에게 그만 이사를 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앤디는 그에게 미안해했으나 동시에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이골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앤디의 요청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는 앤디의 집을 떠났다.
몇 달 뒤, 앤디는 뜻밖의 메시지를 받았다. 케이가 시계 브랜드를 창업했다는 근황을 전한 것이다. 케이는 새로운 소식과 함께 자신의 브랜드에서 만든 시계를 앤디에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는 앤디를 잊지 않고 선물까지 챙겨 보내고 싶었나 보다.
며칠 후 케이에게서 선물이 도착했다. 앤디가 받은 상자 속에는 세련된 손목시계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가 론칭한 시계 브랜드 이름이 다름 아닌 앤디의 풀네임을 딴 ‘앤디 베르케쉬’라는 것이었다. 그가 앤디에게 선물한 손목시계의 시계판 위에도 앤디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앤디는 시계를 손목에 차며 잠시 멍하니 웃었다. 고작 몇 달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케이에게도 분명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홍콩에서 온 철부지 아들 키우길 잘했네. 그 애가 이런 식으로 효도할 줄이야.”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지만, 앤디의 얼굴에는 묘한 뿌듯함이 스쳐갔다. 이후로도 그녀는 케이가 선물한 시계를 종종 차고 다녔다. 홍콩 청년에게 한 그녀의 잔소리는, 그렇게 특별한 시계가 되어 그녀의 손목 위에서 째깍째깍 추억을 새겨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