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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 Apr 07. 2022

더럽고, 칙칙하고, 정신없는

베를린에 도착하다


 더럽고, 칙칙하고, 정신없는


겨울의 베를린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우중충했고,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길거리가 점점 더 지저분해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안 그래도 칙칙한 하늘, 칙칙한 건물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회색과 검은색 이외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름에 여행차 방문했을때 녹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며 생기가 넘치던 그 도시는 축축하고 음울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2019년 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Berlin is poor, but sexy


내가 처음 머물게 된 곳은 베를린 안에서도 노이쾰른이라는 구 였다.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Berlin is poor, but sexy”라는 어록이 무색하게도, 햇빛이 들지 않는 민낯의 도시는 섹시함은커녕 혼잡과 혼돈의 세계였다. Sbahn(지상철) 철도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맥주병과 각종 잡다한 쓰레기, 어쩐지 미심쩍어 보이게 서성이는 사람들은 가는 길 내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딘가에서는 탄 냄새가 풍겨왔고 또 다른곳에서는 쑥 태운 냄새가 났다. 낯선 냄새와 공기밀도,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 문화의 집


내가 당분간 지내기로 한 집에서는 친구와 2명의 독일인들이 살고 있었다. 

짐을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플랫메이트 중 한 명이 오늘 오프닝이 있는 이벤트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아직 비행의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오프닝 파티라는 말에 졸음을 참고 따라나섰다. 


도착할 때 보았던 칙칙한 첫인상과는 다르게, 이벤트가 열리는 건물은 둥근 아치형을 그리며 빛나고 있었고, 바깥에서도 이미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실내는 붉은색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이 몰려 정신없는 가운데 입구 근처의 구석지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는 플랫메이트의 친구가 보였다. 위층의 홀에서는 포럼이 진행 중인 모양이었는데 우리는 그냥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디제이 친구와 이야기를 좀 하다가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벤트는 베를린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트랜스 미디알레 라는, 꽤 유명한 연간 미디어아트 축제였다. 코로나 때문에 그다음 해에는 열리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한정적인 인원만 예약해야 겨우 방문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베를린이 섹시하다는건, 지금이야 치솟는 집값으로 예전 얘기가 되었지만, 아마 적은 생활비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도시 곳곳에 작은 갤러리와 예술공간, 미술관들이 있어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도시와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도시재생사업이라던가, 폐공장을 문화센터나 테크노 클럽으로 재탄생시킨 사례들,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하며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이 어디서든 해프닝을 만드는 그런도시, 혹은 그럴 거라는 환상속의 도시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눕고 나니 첫날 바로 잠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분간 머무는 곳이지만 같이 지내는 사람들 모두 친절하고 착한 것 같다고, 베를린엔 갈 곳이 많아서 좋다고. 

시차때문에 잘시간을 놓치니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여기서 어떻게 살지, 이런 데서 어떻게 살지? 독일에 영영 갇혀버린 것 아닐까? 집에 가려면 기차를 네 시간 타고 공항에 가서 열몇 시간을 꼼짝없이 견뎌야 하는 그 짓을 또 해야 한다니, 

우리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신없이 비행기와 기차를 타느라 창밖 풍경 구경하듯 지나쳤던 현실이 몰려왔다. 


막막하지 않았다. 슬프지도, 벌써부터 집이 그립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당장 한달 뒤의 미래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직 나한테 우리집은 한국이었고,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왔고, 그리고 또... 


그런 상념들과, 당장 내일부터 해야 할 일들과, 또 다른 걱정거리들이 떠오르다 사라지는 와중에 첫날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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