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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 Apr 11. 2022

나도 유럽감성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독일에서 집 구하기

나도 유럽감성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독일식 아파트가 한쪽으로 늘어선 길, 막다른 골목 끝에서 물 섞인 갈색 페인트 벽 아파트가 어색하게 튀어나왔다. 여기가 한국인가 독일인가, 아파트 벽에는 오래되고 촌스러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뒷마당으로 보이는 곳 너머에는 배경을 차단하는 높은 벽이 서 있어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주변의 평범하고 아름다운 독일식 아파트와는 대조적으로, 이 현대적이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못생긴 복도식 아파트. 내가 상상해왔던 “외국스러운 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곳은 어쩌다 보니 1년 넘게 지낸 첫번째 우리 집이 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독일 웹사이트와 한국인 커뮤니티를 뒤적거렸다. 

처음 독일에 발을 내디딘 유학생들이 집을 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WG Gesucht같은 독일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인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여러 사람과 집 하나를 쉐어하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걸 WG(Wohngemeinschaft)라고 부른다. 한국에서처럼 세입자가 집을 보고 고르는 게 아니라 메시지로 소개를 보내고 방문 겸 인터뷰 약속이 잡히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잘 지낼 수 있을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외국인 WG생활의 장점이라면,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독일 생활에 스며들듯이 적응하기 좋다는 것이다. 같이 사는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내 그룹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또한 장점이다. 하지만 처음 독일에 온,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을 반겨주는 곳은 사실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같이 사는 동거인을 넘어 친구처럼 교류하고 지낼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 

언어는 둘째 치고서라도, 한국에서는 익숙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뜨악하게 하는 행동을 나도 모르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우리에게는 경악스럽지만 그들은 이게 왜? 라며 오히려 반문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라면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는 것이나, 독일인들이 식사 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코를 푸는 것, 그런 문화 차이 말이다.


때문에 처음으로 독일에 도착했다면 일단은 한국인 커뮤니티를 통해 집을 구해서 차차 독일 문화에 적응해나가고, 문화 차이에 대한 주관을 먼저 만드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이다. 겪어보고 나니 이게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저 사람만 유독 그러는 건지, 내가 상대방의 행동을 존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 주장을 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집에서만큼은 한국어를 쓰고 싶었다. 공동생활은 잘 맞았지만 하루 종일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떠들다 보니 저녁이 되면 스트레스가 쌓여 피곤해졌고, 한국음식도 괜히 신경 쓰지 않고 요리하고 싶었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 한국인들의 정보가 필요했다.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한국음식재료를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마트 Sojasauce가 아닌 국간장이 필요했다), 어떤 샴푸가 좋은지(독일의 석회물을 쓰자마자 머리카락이 바스라졌다), 질 좋은 노트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종이가 너무 얇고 디자인도 해괴했다), 와인병과 유리는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몇 달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미용실은 어디가 좋은지(결국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한국식 치킨 맛집이 어디 있는지 등등의 각종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들이 이어졌다.

 그때로부터 3년간의 경험이 쌓인 지금까지도 나는 공동생활을 예찬한다. 월세가 혼자 사는 것보다 싸기도 하고, 무엇보다 외로운 타국 생활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언제나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날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고, 내가 자주 가는 카페와 좋아하는 단골 술집이 있으며 심심하면 혼자라도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지 알고 있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혼자 살 집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사진출처:인스타그램@berlinauslandermemes


베를린 리포트와 WG gesucht에 스팸처럼 메시지를 와다다 보내고 나니, 내 예산에 맞고 위치도 너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집은 그 집 밖에 없었다. 


집의 내부는 정말 한국식 아파트 구조와 비슷했다. 방을 둘러보니, 주황색 부엌장과 흐린 벽돌색 타일, 벽에 붙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두 개의 방문이 대칭으로 나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 침구, 옷장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발코니와 연결된 문이 있었다. 공간을 장악하는 새파란 보노보노 이불만 빼면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긴 좀 어두침침한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찾아보는 건 어때?” 같이 간 친구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누구는 300유로대에 집을 구했다느니, 누구는 400유로에 구했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서 이 집의 조건에 비해 조금 비싸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곳을 잡지 않으면 몇 달간은 짧은 렌트를 전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주거지 등록서류가 꼭 필요했고, 당장 주거지 등록을 할 수 있는 집을 찾은 이상 더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 아침,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월세 450유로와 3달치 보증금 1350유로를 건네주고 키를 받았다. 

한 번에 큰돈이 나가니 속이 꽤나 쓰렸다. 그래도 대중교통이 5분 이내 거리에 있고 마트도 꽤나 가까워서 괜찮다고 위안하며, 이만한 위치와 이 정도 가격에 집을 구했다는 것 만으로 감사하기로 했다.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나는 문지방에 서서 한참 동안 방을 쳐다보았다. 보노보노 이불보는 집주인 아주머니가 가져가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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