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비 Apr 20. 2022

독일에서 알바찾기

독일에서 아르바이트하기(상)

낯선 나라에 오면 모든 사소한 일들이 게임 퀘스트스럽다.(심지어 다 하고 나면 레벨업이 된다) 

나는 초보자 플레이어고 게임 진행을 위해 퀘스트를 해야 한다. 

게임을 진행하고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 게임 내의 NPC한테 말을 걸면, 그는 맨입으로는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없으니 옆 마을에 있는 미치광이 연금술사한테 가서 무슨 마력이 깃든 술사의 서약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약 아이템을 구하러 다른 마을에 있는 그 미친 술사한테 가고, 그놈은 또 희귀한 재료(인어의 눈물이나 초승달의 기운이 깃든 반지 뭐 이딴 이름일 것이다)를 구해야 하니 대신 구해주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웃기게도 내가 찾던 희귀 재료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물리치며 지나온 그 초기 마을에 있다. 그럼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 사냥을 해서 재료를 구해오는 것이다. 



준비서류들


나의 퀘스트도 똑같다. 조금 더 현실적일 뿐.





어느 날은 일을 구해보기로 결심했다. 

독일에 온지도, 어학원에 다닌지도 세 달 남짓 지난 시점, 어학원 밖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려니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한식당은 싫고, 청소나 베이비시터도 싫고.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도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독일어로 서빙을 뭐라고 하는지 번역해 본 다음, 곧 인디드와 구글에 Event Servicekraft, Gastronomie라고 검색했다. 그리고 내 이력서를 조금 간략하게 수정하고 괜찮아 보이는 곳들에 이력서를 뿌려댔다. 독일어 A2, 영어 가능, 서비스업에 좋은 외모. 

하루에 두 군데에서 네 군데 정도, 약 일주일 가량 이력서를 돌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뷰를 볼 기회가 생겼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 라는 막연함이 먹힌 것이다. 인터뷰 전날, 독일어가 익숙하지 않다고는 말해두긴 했지만 혹시나 몰라 몇 가지 기본 문장을 연습하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는 잠이 들었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독일어를 얼마나 할 수 있어?”

“Ein bisschen, aber ich muss langsam sprechen.”(조금, 근데 천천히 말해야 해)

“그 정도면 됐어. 넌 영어를 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정말 이게 괜찮다고?

전날까지 어떡하지 동동거리며 걱정하고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술은 괜히 마셔서 머리만 아팠다. 

나는 계약서를 받아 들고, 혹시나 여기가 유령회사라서 나를 어디에 팔아넘긴다는 그런 내용일까 봐 구글 번역기로 조금씩 번역을 해가면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신체포기각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비로소 싸인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일하면서 유명인을 보더라도 밖에서 언급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봤을 때는 조금 신나기까지 했다. 


사무실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모양이었고 오래된 독일식 집에 나무 바닥이라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니폼을 받으러 오래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수십 벌의 하얀 셔츠와 남색 조끼가 걸려있는 사무실이 나왔다. 사무실 직원은 내 사이즈에 맞는 셔츠와 조끼, 앞치마와 넥타이, 병따개 두 개, 그리고 Frau Lee라고 써져있는 배지를 수트팩에 담아주었다. 


“신발은 검은색 구두를 신어야 해, 스니커즈 말고 내가 신은 것 같은 비즈니스 구두. 

유니폼 보증금 100유로는 첫 월급에서 나가는데 계약이 끝나는 날 돌려줄 거야.”



한국이었다면 지하상가 신발가게에 가서 검은색 단화를 싸게 샀겠지만, 이곳 독일에 지하 상가따 위는 없다. 

이딴. 간단한 일도 주변의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며 궁리했다. 


일단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번화가로 갔다. 

구글맵으로 신발 브랜드가 모여있는 가게를 찾아냈으나 조금 저렴하다 싶으면 발이 너무 아팠고, 일할 때 외에도 신을 수 있을 만큼 예쁘다 싶으면 너무 비쌌다. 당장 내일모레 일해야 하는데 이미 신발가게를 두세 군데는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니폼으로 100유로를 내고 또 또다시 돈이 들어간다. 

하루 종일 신고 있을 거라면 차라리 발 건강을 지키자, 하는 수 없이 100유로가 넘는 가격의 옥스퍼드화를 사버렸다. 미니잡을 하려고 15만 원짜리 구두를 산 것이다.

그 구두는 계약 종료 이후 한 번도 신지 않아 먼지가 쌓인 채로 고이 모셔져 있다. 언젠가 또 신을 날이 오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