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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달샘 Jan 27. 2023

사랑은 고독 위에서 완성된다

영화 ‘헤밍웨이와 겔혼’, ‘스텐리와 아이리스’를 보고

  사막

                                 오르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불문학을 전공하던 시절, 어느 날 교수님이 수업을 하시다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하셨다.      

  “인간이 평생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


  “고독이네.”

  그분께 받았던 수업 내용은 기억나는 게 없는데 오직 이 질문과 대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지금도 가끔 생각에 잠긴다.           



  영화 <헤밍웨이와 겔혼>의 첫 장면에서 초로의 나이 겔혼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어리석게도 섹스를 간절히 원하는 사내에게 빵으로 약을 올리듯이 쉽게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평생을 종군기자로 살면서 전쟁터를 집처럼 드나들며 살았고 사랑은 가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겔혼과 결혼 후 헤밍웨이는 겔혼이 자신에게 순종하길 바란다. 겔혼이 종군기자로 다시 전쟁터로 찾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겔혼은 자신의 의지대로 전쟁터로 떠나고 홀로 남겨진 헤밍웨이는 겔혼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이 미움보다 훨씬 오래간다고. 겔혼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글도 못쓰고 날마다 술만 마시고 있다고. 겔혼은 헤밍웨이가 보고 싶어도 전장을 떠나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강한 남성성 뒤에는 엄마한테 받지 못한 모성성을 자신의 여자에게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잡지 않았을까. 그는 겔혼이 신청한 콜리어 잡지의 특파원 자리를 가로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겔혼이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싶었. 겔혼은 그런 헴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헴이 자신의 자리를 가로채서 못 가게 해도 결국 병원선을 타고 전쟁터로 떠난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보고 글로 옮기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겔혼이 살아있는 언어로 전쟁을 타전하는 동안 헴은 메리 월시라는 여자를 만나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자를 잘 보살피고 잘 챙겨주는 여자. 잘하도록 격려하는 여자.’ 메리 웰시는 그런 건 잘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녀는 그의 네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평생 헴의 곁에서 그가 바라는 여자로 남는다. 헤밍웨이가 원할 때  겔혼이 그 곁을 지켰으면 그녀의 인생이 더 가치 있고 행복했을까?

영화 속 혜밍웨이(클라이브 오웬)와 겔혼(니콜 키드만)

  TV방송과 인터뷰를 마친 겔혼이 오래전에 헤밍웨이가 전쟁터에 있는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다. 그 때 창가로 날아온 까마귀의 눈 속에서 비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주름진 얼굴, 핏발로 충혈된 눈, 흰머리, 굽은 등의 겔혼이 배낭을 메고 어딘가로 향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그녀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도 무료하고 나태한 삶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서 헤밍웨이의 삶을 들여다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당대 미국 문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찬사를 받은 문인,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던 남자. 화려한 인생이다.

  “그의 재능은 맥 빠진 남성성에게 추월당했다. 가짜 가슴털 뒤에서 나오시오, 어니스트.”

  영화 속에서 이스트만이라는 비평가는 그의 재능을 비꼬며 이렇게 말해 공개석상에서 헴에게 주먹질을 당한다. 헤밍웨이의 전처 네 명은 모두 기자 출신이었고, 셋은 헤밍웨이의 바람으로 인해 결혼이 깨졌다. 그는 똑똑하고 사회적인 여자를 좋아했지만, 막상 결혼 후에는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었다. 무모하게 도전해서 스스로를 더 높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와 승부욕,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분노, 증오 등의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성향을 칭찬보다는 비난으로 강요와 억압적인 훈육을 했던 어머니에 대한 반동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를 끊임없이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게 만들고 정신적 열기가 들뜬 상태에서 글을 써대고 미친 듯이 인생을 달려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그의 이러한 성향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가 문학이라는 자식을 낳으며 아내를 갈아치우는 동안 그에게 버려진 자식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의 둘째 부인 폴린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그레고리의 삶은 화려한 인생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를 돌아보게 한다.         헤밍웨이는 그레고리가 8살 때 아내와 아들들의 생계에 대해 어떤 조치도 없이 집을 나가버려서 처자유기죄로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폴린이 사망하자 헴은 폴린의 죽음을 그레고리의 탓으로 돌리며 두 번 다시 그레고리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레고리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원망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약물에 중독된 삶을 살았다.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제 여장으로 성정체성 혼란을 느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남성적 취미에 몰입했다. 반대로 그레고리는 너무도 남성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껴 63세의 나이로 성전환수술을 받아 글로리아 헤밍웨이란 여성으로 살게 된다. 2001년 그레고리는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다 체포되어 여성 교도소에서 심혈관질환으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고독이라면 우리는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화려한 인생은 고독을 견딜 필요가 없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으니. A가 잠시 없으면 곧바로 B가 A의 자리를 대신해 준다. <헤밍웨이와 겔혼>, <스탠리와 아이리스>와 함께 ‘고독’을 되새김질하며 일주일을 보낸 나의 결론은 ‘스탠리와 아이리스처럼’이다. 화려한 인생보다 평범한(남들 보기에 초라한) 인생이 더 좋다. 남편과 사별한 아이리스는 책임져야 할 어린 아들과 미혼모 딸에 돈 없고 철없는 동생 내외까지 떠안고 산다. 매일 반복되는 제빵공장의 단순노동에 지쳐 돌아오는 어느 밤, 스탠리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장면에서 나는 ‘그래 바로 저거야. 우리 인생에 저런 장면 몇 개가 바로 고독을 이길 힘이 되어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스탠리. 아이리스는 그런 스탠리에게 인간적인 온정을 나눠주었고 스탠리도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 인생의 모든 악조건도 사랑해 준다. 지금 우리에게 삶의 고독을 견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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