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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달샘 Jan 27. 2023

그의 마지막 연인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과 기억에 관한 짧은 소설

        

  “나의 마지막 연인,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세상을 등졌다. 나를 떠났을 때 그는 안경을 잊고 내 집에 두고 갔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안경을 썼다. 건강하던 내 눈을 그의 근시와 뒤섞어 흐릿한 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중에서           




  소설 <슬픈 짐승> 속 주인공인 그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녀의 인생에는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고.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만 간직하겠다고.

  정말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 수 있는 법이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오히려 꽁꽁 봉인하고 싶은 기억을 어느새 꺼내 보고 후회하며 살아가는 날이 많다. 다행인 것은 삶의 상처도 시간과 버무려 곰삭으면 선물로 느껴지는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건 참 신기해. 예상과는 다르게 동작하지. 우린 시간에 얽매여 있어.’

                                                                                         

                                 -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의 말     





  기억이란 대체 뭘까 가끔 생각에 잠긴다.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의 색깔이 다른 것에 대하여.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기억이 다른 것에 대하여.


   누군가와 고작 3년을 함께 했을 뿐인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을 추억하는 한 남자를 떠올려본다.     

  그는 그 기억으로 인해 늘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자기 안으로 침입했는지 밖으로 터져 나왔는지 모를 사랑이 벚꽃처럼 흩날리던 시절을 떠올린 후로 그는 현재를 잘 살아내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브라키오사우르스도 없는 어느 대학의 붉은 벽돌담 아래에서 시작된다. 담 모퉁이에서 그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우연히 그녀가 그의 곁을 스쳐 갔을 뿐이다. 그에게 그녀는 오래전에 만났어야 할 누군가였거나 오래전부터 기다린 누군가였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몰랐다.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날 이후 그의 눈은 줄곧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다녔다.

  

  그녀의 기억은 어느 저녁 대학가 셀프 주문 카페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위는 소란스럽고 자리는 비좁았다. 소란이 일상인 카페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어색하게 웃는 남자와 어색하게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뒤돌아서 조용히 나가고만 싶었다. 그녀는 간곡히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를 생각해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에는 그의 커피만 한 잔 놓여 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주문하러 일어서지 않았다. 여전히 어색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히죽거리고만 있는 그에게 불쾌한 감정마저 느끼며 그녀는 커피 주문을 하러 일어선다. 그녀는 그날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날의 공기가 불편했던 것만 기억한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기도 하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는 기억한다. 그녀가 입었던 옷과 그녀가 지었던 불편한 표정들과 간간이 창가로 돌리던 그녀의 시선까지.     

  

  그런 그가 그녀를 먼저 떠났다. 그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에게 흔한 여자였다. 그녀는 이제 그의 새 장식장에는 둘 수 없는 값싼 소품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즈음 그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낡은 소품들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정돈된 자리는 그의 새로운 품격에 걸맞게 반짝이는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는 이제 땅에 발을 대지 않고도 빠르게 걷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빠르게 걷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가 그렇게 속도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의 시야는 앞으로 좁혀졌다. 옆으로 스치는 것들을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속도의 계산법에는 시간과 거리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의 속도를 자랑스러워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속도에 관심을 끊은 둘째 아들을 대신해 첫째 아들이 누구보다 빠르게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는 그렇게 부모님의 인생을 새로 쓰고, 자신의 인생을 새로 썼다.

  그뿐이었다. 발을 땅에 대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었는데 그토록 바랐던 판사임용 허들도, 검사임용 허들도 뛰어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국변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국선변호사라는 명패는 무슨 소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허들을 뛰어넘지 못한 결과로 받은 것일 뿐이었다. 어느 날 그의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 뒤로 그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도 그가 낼 수 있는 속도의 최대치는 80km였다. 속도에 몰두하던 사람이 속도를 낼 수 없어 그의 삶은 한동안 공허했다. 장식장 빈자리에 무언가 채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즈음 만난 여자는 아파트와 자동차라는 소품을 가져왔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계에서 한자리하는 것도 귀중한 소품목록이었다. 그렇게 빈자리를 채웠는데 그는 왜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가장 귀한 소품인 아이가 없어서였을까.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그날 벽돌담 밑을 지나가던 그녀가. 그녀와 함께한 가난한 날들이 기억 저편에서 이편으로 떠올랐다. 모두 정리해서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은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깊이 봉인해 둔 기억이 한 번 되살아나니 날마다 샘솟는 물처럼 그를 젖어들게 했다. 그녀가 전화기 너머 불러주던 가난한 노래가. 삐삐로 그녀와 나누던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들이. 느린 자전거에 몸을 싣고 그녀와 바람을 맞던 봄날의 공원이. 그는 이제 무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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