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그냥 제가 의도하는 게 뭔지 작은 예시를 하나 보여드리고 싶어요. (마틴이 스티븐의 팔뚝을 콱 깨문다) 제가 사과해야 할까요? 제가 상처를 쓰다듬어 드려야 할까요? 사실 그러면 더 아플 거예요. 벌어진 상처를 만지면요. 우리 둘의 기분이 다 나아지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마틴은 이제 자신의 팔뚝을 힘껏 깨문다, 피가 터져 나오도록) 이해하시겠어요? 이건 비유적인 거예요. 제 예시예요. 이건 비유예요. 이건 상징적인 거예요.
영화 <킬링 디어> 중에서
영화 <킬링 디어> 드로잉 포스터
마틴: 절 쏘고, 그다음에는요? 대답해요.
스티븐: (총을 들고 있어도 공포로 목소리가 떨림. 숨이 가쁨) 널 뒤뜰에 묻을 거야. 그럼 이제 넌 썩을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마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 못 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겠죠. “난 한 사람만 죽였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네 사람이 죽어요?” “난 한 명만 쐈어요.” 그러니 뒤뜰에 구멍을 팔 거면 큰 구멍을 파야 할 거예요.
영화 <킬링 디어> 중에서
<킬링 디어>의 주인공이 스티븐일까요? 저는 마틴에 주목했습니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캐릭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죄짓는 자를 단죄하러 온 존재 위의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수술이 일상이어서 술을 마시고 수술을 하는 의사 스티븐의 실수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집 아들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 스티븐(의사)의 부와 권위에 눌려 마틴(의료사고의 피해자 가족)의 어떤 항변도 세상이 들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법정으로 간다고 해도 결과는 뻔합니다. 대체로 이 세상의 법은 스티븐에게 어떤 단죄도 내리지 않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몇 년 전에 어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대학 시절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남자는 고시를 준비하던 사람이었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는 작은 키에 상어처럼 송곳니가 돋아있고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벙글벙글 웃는 모습에 마음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어느새 커플이 되었지요. 남자는 남들이 선망하는 서울의 모 대학 출신인데 군대 징집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지방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었고요. 둘의 연애 장소는 늘 도서관이었지요. 특별히 멋진 연애를 하지는 못했지만, 캠퍼스에서 알콩달콩 풋풋한 추억들을 쌓아갑니다.
어느 날 남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엄마가 어제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걸 보셨어. 너와 진지하게 사귀는 거냐고 물으셨어. 그런 거면 애초에 그만두라고.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둘 사이 맺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어.” 그가 그런 거친 말을 그녀에게 날 것 그대로 옮긴 이유는 무엇이일까요.
그는 그녀를 만난 지 3년 만에 고시에 합격합니다.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그는 그녀에게 이별 통지서를 보냅니다. 그는 그녀와 이별할 날짜를 고시 합격하는 날로 미리 염두에 두었을까요?
그날 그녀의 생은 멈췄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날을 지웠습니다. 지워야만 했습니다. 환한 날들을 지우기 위해 어둠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녀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으니까요. 친구들이 그녀에게 값싼 위로를 던지고는 뒤돌아서 ‘그럴 줄 알았어. 당연한 거 아니야! 쟤가 뭐 볼 거 있다고 고시 합격한 사람이 계속 사귀겠어? 고등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하던 애가 남자 하나 잘 물어서 호강하려고 했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죠.
그녀는 오랜 시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사람을 믿은 게 잘못이었구나. 남자에게 의지해 살려고 한 게 잘못이었구나. 다시는 남자에게,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자.’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려면 우선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도 학과도 잘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학점도 잘 받아놔야 하지요. 이전에 그녀의 인생에 중요하지 않았던 선택들이 그날 이후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인생을 다시 세팅해야 했습니다. 그는 스물일곱에 고시에 합격했고 그녀는 스물일곱에 재수 학원에 등록합니다. 그녀는 공부가 잘되는 날도 공부가 잘 안 되는 날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그의 얼굴을 수없이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있나요? 저에게 죄가 있나요? 저에게 죄가 없다면, 제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지요? 컴컴한 골목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가던 늦은 밤 그녀는 마음으로 그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있다면 그에게도 고통을 그에게 주세요. 오만한 그가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해 주세요. 이 세상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해 주세요.’
8년 후 둘은 재회합니다. 그는 수줍은 듯 들뜬 듯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처럼 활짝 웃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가 다시 대학을 가고 교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오랜만에 그를 마주한 그녀는 그러나 살짝 화가 납니다. 키는 전보다 더 작아 보이고 머리는 더 커 보이고, 이는 교정 중인데 관리를 못 해 철사에 녹이 묻어 있더랍니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이미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났는데 아직 아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몇 번 봤던 그의 남동생이 불운의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는 무슨 이유로 그녀를 만나자고 했을까요? 한 번의 만남 후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뒤에서 우리가 이렇게 끝낼 수 없지 않으냐고 울먹이는 그는 그녀에게 이미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을 바란 것일까요?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그는 울먹이며 말합니다. 미안했다고. 그녀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는 임신을 하고 그가 그렇게나 바라던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전화는 받았습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와 전화로 문학이나 예술 이야기를 하면 8시간도 통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그는 말 잘 통하는 친구였으니까요.
몇 년 후 그녀도 결혼합니다. 나쁜 남자가 아닌 착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전화합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지요. 그가 무슨 권리로 그녀에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그녀는 진저리가 납니다. 그날 이후 그의 전화번호는 그녀의 수신차단번호 목록에 오릅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이렇게 마음을 굳히며 살아갑니다.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20년의 세월 동안 나는 나를 모질게 몰아붙이며 살았어. 너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날부터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버림받는다는 공식이 내 머리에 박혀 버렸어. 나를 이렇게 모질어지게 만든 너를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어.’
그녀에게도 아이들이 생깁니다. 그녀에게 이 세상 어떤 것도 아이들과 등가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아이가 몹시 아플 때 그녀는 아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신께 날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고 촛불을 밝혀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기도를 올립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어 그렇게 기도합니다. 신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었을까요. 아이의 병은 천천히 낫습니다. 이제 건강하게 학교를 다닙니다. 그렇게 그녀는 착한 남편과 가끔 예쁘지 않은 말을 하는 사춘기 아이들과 햇살 같은 날들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오래전 소식을 끊었던 그의 카톡 배경사진을 보게 됩니다. 그의 아이가 손글씨로 쓴 편지를 띄운 프로필 배경사진을. 편지 속에는 그의 아이가 어딘가 몹시 아프고 그는 아내와 이혼한 듯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순간, 기묘한 감정이 그녀를 휘감아 돕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들이 나와 연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