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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달샘 Jan 27. 2023

사랑의 불균형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영화 <더 리더> 포스터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열다섯의 마이클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한나로 인해 평생 부서진 삶을 살았다. 누구도 다시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한나를 다시 만났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말도 없이 떠날 수가 있냐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그 대신 그녀가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은 문맹의 아픔을 덮어주었다. 다만 그녀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 한나가 출소 전 죽음을 택한 것은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으리라. '꼬마야, 이제 너의 인생을 살아라. 나로 인해 더 힘들어하지도 아파하지도 말아라. 고맙다.' 마이클은 한나의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딸에게 자신의 아픔을 말해 주는 것으로 아픈 과거와 작별한다. 그는 사랑의 불균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했다. 






  어쩌면 불균형은 사랑의 전제조건이 아닐까? 내가 그에게 사랑을 준 만큼 나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거래로 생각한 것이리라. 그에게 아직 사랑은 실행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다가왔다 달아난 사랑은 그러므로 모두 사랑이 아니었다. 내 몸에 돋은 상처 딱지만 바라보며 아파하느라 그를 아니 그들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동안 남편과 많이 싸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더 희생하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는 것.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인지, 내가 왜 너를 위해 이렇게 희생해야 하는지. 이런 생각에 종종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분이 풀릴 때까지 남편을 향해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으리라. 

  그렇게 싸우던 어느 날 순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처음으로 나를 향해 그릇을 날렸다. 내 앞에서 분해된 그릇 조각과 그로 인한 분열의 소리보다 나를 더 아프게 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이었다.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내 아이들의 눈동자. 나는 그 뒤로 남편과 나의 가사분담을 양팔 저울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더 희생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유는 하나,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의 저울을 내려놓으니 누가 집안일을 더 하는지 전처럼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남편이 피로를 끌고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남편이 몫으로 나누었던 일도 내가 했다. 그런가 하면 내 몸이 지칠 때는 아이들 밥도 간편식으로 먹이고 푹 쉬었다. 무심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그런 날엔 평소보다 집안일을 더 살피고 아이들도 잘 챙겼다. 어쩌면 나는 고장 난 저울로 저울질을 하느라 그렇게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의 돌아봄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사라졌을까.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새 중학생이 된 두 아들과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진저리를 치며 미로처럼 숨었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우리 둘째 아이는 몸이 피곤할 때면 나에게 화살처럼 뾰족한 말을 쏘아댄다. 그럴 때 얘가 왜 이리 버릇이 없지? 이렇게 버릇없이 키워선 안 되지? 이런 마음으로 눈을 똑 뜨고 훈계를 했더니 남편이 나에게 “그냥 좀 부드럽게 받아주면 안 되겠니?”라고 말한다. 돌아보니 내가 학창 시절에 몸이 피곤하면 엄마에게 그렇게 쏘아대곤 했었다. 그래, 나의 엄마가 사랑으로 인내하며 그런 나를 품어주었듯이 나도 좁은 나의 품을 사랑으로 넓혀야지. 아이들을 더 믿고 기다려야지. 사랑은 어쩌면 몸짓언어가 아닐까. 침묵의 기다림 없이 말로 사랑을 전하기는 늘 어렵지 않았던가. 

  돌아보니 내가 생활에 너무 힘을 줄 때가 많았다. 암탉이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두는 달걀을 소란(巢卵)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 가족이 편하게 따뜻한 둥지로 모여들게 하는 소란 같은 엄마이고 싶다. 사랑의 불균형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언젠가 내 사랑을 완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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