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죽변의 겨울
4학년이 끝나갈 무렵, 또다시 짐을 싸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뿌리째 뽑힌 어린 나무처럼 서 있었다.
울릉도에서 벗어나 겨우 숨을 돌릴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은, 고향에 뿌리내리는 일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이번엔 죽변이라는 바닷가 마을로 향했다. 친척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이라는 이름도 더는 우리를 붙잡아 두지 못했다.
죽변의 바닷바람은 늘 짠맛을 품고 불어왔다. 바다에 서린 소금기 속에서 대나무 숲이 쉼 없이 흔들렸고,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슬레이트 지붕 여섯 채 가운데 두 번째 집이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울릉도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러나 또 다른 겨울이 시작되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이번엔 어부가 아닌 대한통운 창고 일꾼이 되었다.
낮에는 땀에 젖고, 밤이면 술에 잠겼다.
그리고 그 술은 어느덧 우리 식구의 삶까지 삼켰다.
“얘들아, 나가 있어라.”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친구 명섭이네 집 부엌으로 몸을 숨기던 밤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게 쌓였다.
그 사이 집에서는 아버지의 고함, 깨지는 그릇, 울음 섞인 소리가 뒤섞여 폭풍처럼 몰아쳤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늘 장롱 반쪽과 깨진 밥그릇 몇 개뿐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세상을 향해 울부짖었다.
“내가 이런 돈 벌려고 사는 건가….”
그러곤 월급봉투에 불을 붙였다.
붉은 불길 속에서 지폐가 검게 그을려 갈 때, 우리는 울먹이며 그 불을 껐다.
하지만 반쯤 탄 지폐는 은행에서도 거절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세상의 불합리와 가난의 냉기를 다 알 수 없었지만, ‘불타버린 한 달의 삶’의 무게는 어렴풋이 느꼈다.
피신조차 힘들던 겨울밤엔 해녀 친구의 집에서 셋이 나란히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바람을 막았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다.
울릉도 교회에서 선생님이 해주시던 그 이야기들을.
“그 다음엔 어떻게 돼?”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처음 알았다.
이야기는, 얼어붙은 가슴에도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유난히 공부를 잘했다.
명섭이네 부엌 옆에서 숙제를 하던 내게, 명섭이 어머니는 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밥 먹고 가라.”
그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그때는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점점 병약해지셨다. 울화병과 폐병이 겹쳐 자리에 누운 시간이 늘어갔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책을 읽었다.
“우리 아들, 공부만 잘하면 된다.”
병든 목소리였지만, 그 한 문장은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린다.
가난은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여름엔 런닝과 운동팬티, 겨울엔 얻어 입은 헌옷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창피하지 않았다.
우리 마을의 아이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용돈이 없어 오징어 다리 떼기, 성게알 다듬기, 홍게 다리 정리 같은 일을 도우며 작은 돈을 모았다.
일을 끝내면 해녀 아주머니가 내밀던 성게알은 세상에서 가장 달고 짭조름한 맛이었다.
홍게 다리를 다듬고 남은 몸통은 늘 우리 차지였기에, 죽변에서 보낸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홍게를 먹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6학년이 되었고, 나는 반에서 2등을 했다.
우등상을 받을 차례였지만, 갑작스럽게 고향 매화로 다시 전학을 가야 했다.
죽변초등학교 운동장 위로 반짝이던 바다를 뒤로하고 떠나는 길, 나는 교무실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상장을 받지 못해도 이상하게 서운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상을 이미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티는 법을 배웠고, 참아내는 법을 배웠으며,
무너지는 집 안에서도 따뜻함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 2년은 비록 내 인생의 겨울이었지만,
그 겨울 속에서 나는 세상의 온도와 사람의 마음을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