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배운 것들

by 전병근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배운 것들

머리는 복잡했지만 몸이 고단해지면 이상하게 생각이 단순해졌다.

사람의 마음에 밟힌 흔적도 육체처럼 땀을 흘리면 조금씩 낫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점심시간 때 혼자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영애를 떠올리던 날이 많았다. 마주 앉아 수줍게 웃던 얼굴, “오빠, 언니가 좋아했던 라일락향 기억나요?” 라고 말하던 그 미소. 하지만 그 기억을 다시 붙잡아도 돌아오는 것은 결국 가슴 한쪽을 톡 건드리는 바람 같은 허전함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붙잡아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놓아야 서로가 더 살아진다는 것을.

민정은 떠나기 전까지 말없이 나를 걱정했고, 영애는 떠난 뒤에도 나를 위해 성숙한 선택을 했다.

그 두 계절은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 안에서 더 오래 남았다.

내 마음에도 결국 계절이 왔다.

조선소에서의 삶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한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민정의 조용한 배려, 영애의 솔직한 마음.

그 두 계절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저 누군가를 따뜻하게 챙기는 일, 언제든 편히 기대게 해주는 일,

말보다 행동이 먼저 가는 진심. 나는 그 집의 두 계절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사랑의 결말은 모두 아픔이었지만 그 아픔은 결국 내 마음에서 단단한 줄기를 틔우고 있었다.

두 계절을 보내고 난 뒤의 봄. 영애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날

나는 부산 거리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혼자 걸었다.

풍경은 달라진 것도 없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지만 내 마음은 전과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았다.

아프지만 끝났다는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조용한 의지가 마음 한켠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두 계절을 지나면서 나는 누군가의 아들로만 살던 사람이 조금은 혼자가 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던 청년에서 누군가를 지켜줄 준비를 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계절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키운 것이다.

돌아보면 그 두 사람은 내게 계절 그 자체였다.

민정은 해가 잘 드는 방 안에서 조용히 피던 라일락 같은 봄이었고,

영애는 장맛비처럼 뜨겁고 솔직한 여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계절을 모두 지나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었다.

그들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그 계절을 지나며 나는 더 큰 사람으로 자라났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사랑을 잃고 난 뒤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두 계절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봄과 여름은 지금도 내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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