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한 영애
육상에 발을 내딛고 난 뒤의 내 삶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 같은 나날이었다.
해상에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삶이 크게 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정도였다.
부산항 7부두 근처의 작은 조선소. 거기서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 용접 불꽃이 튀는 냄새, 짠 바람이 섞여 흐르는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묵묵히 하루를 정리하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해상생활을 계속하는 동기들이 많은 탓인지 부산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낯설고 고립된 존재였다.
술을 마시러 갈 친구도, 하소연할 벗도 없었다.
늘 그렇듯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영애의 모습이 조용한 파도처럼 자꾸 밀려왔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혹시… 나를 잊었을까.
그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 어느 날, 결국 그녀가 다니던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정말 알려준다면 내가 다시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은행 직원은 뜻밖에도 그녀의 근무처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반가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목을 죄었다.
만나야 하나?
만나면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3년이란 시간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 줄까?
며칠을 망설이다가 어느 날, 손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고 신호음이 몇 번 더 울리기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 한마디가 3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을 한순간에 깨뜨렸다.
3년 만의 재회 영애는 중앙동으로 오라고 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하지만 걸어가는 길은 마치 10년은 되는 거리처럼 길고 불안했다.
결국, 우리는 마주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서로의 눈가와 표정에 고요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많이 변했다… 영애야. 그리고… 너무 예뻐졌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네요.”
서로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숱한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나?” 영애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집은 다대포 쪽으로 옮겼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가끔 오빠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 몰래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뜨거워지면서도 이유 모를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래… 나도 다시 뵙고 싶구나. 시간 되면 식사라도—”
영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 돼요. 어머니는 이제 겨우 안정되셨어요.
다 잊어가고 계시는데… 오빠를 다시 만나면 또 힘들어질 거예요.”
그 말은 다시 만난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았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3년이라는 시간이 모든 단어를 가져가 버린 듯 머뭇거리고 끊어졌다.
그러다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만났어요.
근데… 앞으로는 다시 못 만날 것 같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다.”
영애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작게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오빠보다 한 살 어린 사람이에요. ” 나는 애써 웃었다.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
행복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래.” 영애는 눈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오빠도… 잘 지내요. 정말로요.”
우리는 커피숍 문을 함께 나섰고, 횡단보도 앞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손 흔듦에는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흔들림이 있었다.
걸음을 돌린 뒤 등 뒤에서 영애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내가 왜 다시 전화를 했을까…
하지만 후회 속에서도 마음 한켠은 조금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래. 이제 정말 모든 걸 잊어야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살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날, 나는 3년간 묶여 있던 매듭을 비로소 조용히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