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학의 본격적인 학문적 체계는 당(唐)나라 말기인 서기 907년 이허중(李虛中)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당시는 현재의 일간(日干) 중심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이허중
서자평(徐子平)의 뒤를 이어 서공승(徐公升) 이라는 분이 연해자평(淵海子平)이라는 저서를 완성했다. 이 책의 특징은 격국론(格局論)과 신살론(神煞論)을 통해 사주 명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명(明)나라 때인 서기 1368년에 1644년 간에 장남의 명리정종(命理正宗)이 저술되어 지장간(地藏干)과 병약용신(病藥用神)을 다루었다.
명(明)나라의 유백온(兪伯溫)은 적천수(滴天髓)에서 용신(用神)이 격국(格局)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을 폈다. 청(淸)나라 때에는 심효청의 자평진전(子平眞証), 원수산(袁樹珊)의 명리탐원(命理探源), 서락오(徐樂吾)의 궁통보감(窮通寶鑑), 임철초(任鐵樵)의 적천수징의(滴天隨徵義) 등의 걸작들이 나왔다.
사주명리학의 근본은 BC 1100년~771년에 건국한 주나라의 음양학(陰陽學)이 출발점이다.
오늘날 주역의 기원은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과 아들인 무왕으로 알려져 있다. 문왕과 무왕은 삼황(三皇)으로 알려진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씨 중 복희(伏羲)씨가 만든 8괘를 64괘로 만들었다고도 전해진다.
주나라 문왕이 64괘에 괘사(卦辭)를 붙인 것을 주역의 탄생으로 본다. 또한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64괘에 괘사를 붙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무왕의 아들인 주공이 각 괘의 구체적인 뜻과 설명으로 384개의 효사(爻辭) 를 붙였다고 한다. 효사는 괘를 구성하는 하나의 음양부호를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주역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주명리학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이라는 기본개념 자체가 주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단, 괘사(卦辭)가 아닌 생년월일시라고 바탕에 깔고 있으나 해석을 위한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동양사상의 기본 바탕인 주역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뿌리는 주역의 음양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형식구조와 해석방식이 조금 다른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