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걷는다는 것에 대하여
눈이 오는 날, 나는 가끔 동생과 한라산을 오른다.
이번에는 관음사 코스였다.
눈은 소리를 삼키고, 바람은 말수를 줄였다.
산은 언제나 그렇듯 묵묵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은 나를 믿고 따라왔다.
나는 앞에 있었고, 그는 뒤에 있었다.
그 관계는 너무 자연스러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가 더 이상 ‘따라오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눈길에서 미끄러질 때,
숨이 가빠 잠시 멈출 때,
그는 어느새 내 옆에 있었다.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형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사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꽤 멀리까지 함께 걸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같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은 혼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산을 오를 때도 그렇다.
앞서가는 사람이 늘 옳은 것이 아니고,
뒤따르는 사람이 약한 것도 아니다.
눈길에서는
잠시 멈춰 서는 용기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멈춤을
말없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을 다시 걷게 만든다.
형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우리는 말이 많지 않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숨소리와 발자국,
눈을 밟는 소리가 대화를 대신했다.
형제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지만
같은 방향을 기억하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산에서는 다시 같은 능선을 오른다.
그때 알게 된다.
이 사람은 언제든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지가 된다는 것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옆에 서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인생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진짜 의지는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 오는 날의 한라산에서
동생은 나의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같은 속도로 걸었을 뿐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고맙다는 말은
오래 함께 걸어온 사람에게만 할 수 있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형제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산을 내려오는 길에 문득 깨닫는다.
고맙다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시간과 신뢰가 쌓인 관계에서만
자연스럽게 나온다.
눈이 녹으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산 위에서의 그 침묵은
오래 남을 것이다.
형제라서 다행이고,
친구 같아서 고맙고,
이제는 서로를 의지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하다.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같은 침묵을 견디는 사람은 드물다.
형제란, 그 침묵을 함께 견뎌준 사람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