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vermore Jul 28. 2021

혹시 당근이세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라


책상을 하나 샀다. 나무로 되어 있는 튼튼한 책상인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버린 바람에 두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 전에는 재택근무를 해도 식탁에서 했던 터라 어깨며 목이 다 결릴 지경이었는데, 나름대로 책상의 역할을 하는 걸 사 놓으니 한결 작업이 수월해졌다. (게으른 성격 탓에 밥을 먹을 때마다 식탁을 치웠다가, 작업할 때마다 책상 비슷한 걸 다 치웠다가 해야 했던 게 가장 고단했다는 건 비밀이지만)


책상을 사고 보니 그 전에는 잘만 쓰던 노트북 키보드가 갑자기 이상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사에서처럼 화면을 높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궁리하다 집에서도 홈 오피스를 꾸며 무선키보드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었다. 솟아오는 물욕 탓에 불이 번쩍거리는 기계식 키보드를 구경하다 십만원이라는 가격에 뒤로 버튼을 누르기를 몇 번, 신 포도를 마주한 여우처럼 아냐, 분명 이거 불편할 거야, 나는 게임이 아니라 글을 쓸 거잖아, 그렇게 흐린 눈을 뜨고 저렴이 키보드로 눈을 돌린 참이었다.


몇 달 간 열어 보지 않았던 당근마켓이 갑자기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혹시나 그 십만원짜리 키보드가 육만원 정도에 올라와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새 것에 준하는 퀄리티로? 날강도같은 생각을 하며 '키보드'를 검색했다. 십만원짜리 키보드가 육만원에 팔리고 있는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딱 반 정도 감가상각된 퀄리티인 게 사진에서도 티가 났다. 이건 안 되겠군.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까딱이다 결국 무선 마우스와 키보드가 세트로 2만 2천원 - 신품은 3만 5천원 정도 하는 - 이라고 적힌 데 시선을 붙들렸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혹시 판매되었나요?


아닌 게 아니라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당근거래의 성공은 스피드가 좌우하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상대방에게선 답이 금방 왔다. 아뇨 아직 안 되었어요! 경쾌한 대답이었다. 당장 다음 날 직거래를 잡고 기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키보드가 생긴다. 그래서 그 날은 글을 안 썼다. 


다음 날은 야근을 했다. 이미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키보드를 두고 나는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오늘 기약이 없어서요. 혹시 내일 여덟 시도 가능하신가요.... 상대가 말했다. 내일은 제가 야근이어서요..


아. 현대사회의 직장인은 2만 2천원 짜리 키보드 하나 사고 팔 시간이 없다.  


조금 절망스러워지던 차, 상대가 말했다. 늦은 시간이어도 괜찮으시면 제가 퇴근하면서 메시지 드릴게요. 나는 어차피 일정이 없었으므로 기쁘게 그러마고 했다. 나는 당근마켓의 판매자가 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구매자가 된 적은 없었다. 물건이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난 쪽은 언제나 상대방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신기했다. 나는 돈을 받아 이득이긴 하지만, 내 헌 물건을 가져가는 저 사람들은 정말 기분이 좋은 건가? 


그리고 여덟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상대방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 지금 00역인데, 혹시 나오실 수 있나요? 나는 쪼리를 신으며 이미 문을 반쯤 연 채 네네 가능합니다! 했다. 나에게서 기쁘게 레고를 사고 핸드폰 케이스(기종을 잘못 주문했으나 반품기간을 놓친)를 사던 그 사람들처럼. 


습기가 가득한 지하철역 앞에 판매자가 서 있었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것 같은 여자분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에게 다가와, 의심도 하나 없이, 안녕하세요! 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 그 안에 흰 비닐 뭉치 같은 것이 가득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흰 키보드를 뽁뽁이로 꽁꽁 감싼 거였다. 그 아래 마우스도 똑같은 뽁뽁이 뭉치 사이에 빼꼼 나와 있었다. 


너무 덥죠, 요즘 진짜 너무 더워요. 건강 조심하셔야 돼요 진짜. 제가 당근이 처음이라, 이렇게 포장을 하긴 했는데, 집에 가셔서 작동되는지 꼭 확인하시고 알려주세요. 제가 이거를 사고 얼마 안 돼서 키보드를 새로 선물 받게 돼서 너무 아까웠거든요.... 요즘 근데 더워서 물고기도 다 죽는다더라고요.


그녀의 속사포같은 이야기에 혼이 빠지기 전에 얼른 계좌번호를 물었다. 어, 네, 잠시만요, 아, 이게 이렇게 계좌이체를 하는구나. 좋네요. 제가 이게 처음이라. 22,000원. 잊기 전에 얼른 숫자를 입력하고 지문을 꾹 눌렀다. 


이렇게 좋은 게 있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좋은 분하고 또 거래를 하게 돼서... 그녀가 알콜스왑을 몇 개 꺼내더니 혹시 모르니 꼭 닦아 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만 2천원에 키보드에 마우스까지, 게다가 알콜스왑에 뽁뽁이에 다정한 수다까지. 나는 마스크 너머로도 잘 보이도록 눈을 휘어 웃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좋은 후기를 썼다. 그러면서 나에게 물건을 사 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5천 피스짜리 레고를 사고 부품이 3개 정도 없다며 환불을 요구하던 사람도 있었고 약속을 두 번 세 번 미루고 15분이나 늦게 나타난 사람도 있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부족한 물건을 받아 돌아가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 난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물건을 빨리 팔아 치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 보였을까? 어쩌면 그게 사실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뽁뽁이를 두겹 세겹 걷어내고 나니 말끔한 키보드와 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글자라도 더 쓰고 싶어지는 감촉이었다.


다음에 판매할 때는 나도 알콜스왑을 몇 개 챙겨야지. 

가끔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모를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울 때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다시 이렇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