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라
책상을 하나 샀다. 나무로 되어 있는 튼튼한 책상인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버린 바람에 두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 전에는 재택근무를 해도 식탁에서 했던 터라 어깨며 목이 다 결릴 지경이었는데, 나름대로 책상의 역할을 하는 걸 사 놓으니 한결 작업이 수월해졌다. (게으른 성격 탓에 밥을 먹을 때마다 식탁을 치웠다가, 작업할 때마다 책상 비슷한 걸 다 치웠다가 해야 했던 게 가장 고단했다는 건 비밀이지만)
책상을 사고 보니 그 전에는 잘만 쓰던 노트북 키보드가 갑자기 이상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사에서처럼 화면을 높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궁리하다 집에서도 홈 오피스를 꾸며 무선키보드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었다. 솟아오는 물욕 탓에 불이 번쩍거리는 기계식 키보드를 구경하다 십만원이라는 가격에 뒤로 버튼을 누르기를 몇 번, 신 포도를 마주한 여우처럼 아냐, 분명 이거 불편할 거야, 나는 게임이 아니라 글을 쓸 거잖아, 그렇게 흐린 눈을 뜨고 저렴이 키보드로 눈을 돌린 참이었다.
몇 달 간 열어 보지 않았던 당근마켓이 갑자기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혹시나 그 십만원짜리 키보드가 육만원 정도에 올라와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새 것에 준하는 퀄리티로? 날강도같은 생각을 하며 '키보드'를 검색했다. 십만원짜리 키보드가 육만원에 팔리고 있는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딱 반 정도 감가상각된 퀄리티인 게 사진에서도 티가 났다. 이건 안 되겠군.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까딱이다 결국 무선 마우스와 키보드가 세트로 2만 2천원 - 신품은 3만 5천원 정도 하는 - 이라고 적힌 데 시선을 붙들렸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혹시 판매되었나요?
아닌 게 아니라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당근거래의 성공은 스피드가 좌우하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상대방에게선 답이 금방 왔다. 아뇨 아직 안 되었어요! 경쾌한 대답이었다. 당장 다음 날 직거래를 잡고 기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키보드가 생긴다. 그래서 그 날은 글을 안 썼다.
다음 날은 야근을 했다. 이미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키보드를 두고 나는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오늘 기약이 없어서요. 혹시 내일 여덟 시도 가능하신가요.... 상대가 말했다. 내일은 제가 야근이어서요..
아. 현대사회의 직장인은 2만 2천원 짜리 키보드 하나 사고 팔 시간이 없다.
조금 절망스러워지던 차, 상대가 말했다. 늦은 시간이어도 괜찮으시면 제가 퇴근하면서 메시지 드릴게요. 나는 어차피 일정이 없었으므로 기쁘게 그러마고 했다. 나는 당근마켓의 판매자가 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구매자가 된 적은 없었다. 물건이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난 쪽은 언제나 상대방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신기했다. 나는 돈을 받아 이득이긴 하지만, 내 헌 물건을 가져가는 저 사람들은 정말 기분이 좋은 건가?
그리고 여덟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상대방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 지금 00역인데, 혹시 나오실 수 있나요? 나는 쪼리를 신으며 이미 문을 반쯤 연 채 네네 가능합니다! 했다. 나에게서 기쁘게 레고를 사고 핸드폰 케이스(기종을 잘못 주문했으나 반품기간을 놓친)를 사던 그 사람들처럼.
습기가 가득한 지하철역 앞에 판매자가 서 있었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것 같은 여자분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에게 다가와, 의심도 하나 없이, 안녕하세요! 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 그 안에 흰 비닐 뭉치 같은 것이 가득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흰 키보드를 뽁뽁이로 꽁꽁 감싼 거였다. 그 아래 마우스도 똑같은 뽁뽁이 뭉치 사이에 빼꼼 나와 있었다.
너무 덥죠, 요즘 진짜 너무 더워요. 건강 조심하셔야 돼요 진짜. 제가 당근이 처음이라, 이렇게 포장을 하긴 했는데, 집에 가셔서 작동되는지 꼭 확인하시고 알려주세요. 제가 이거를 사고 얼마 안 돼서 키보드를 새로 선물 받게 돼서 너무 아까웠거든요.... 요즘 근데 더워서 물고기도 다 죽는다더라고요.
그녀의 속사포같은 이야기에 혼이 빠지기 전에 얼른 계좌번호를 물었다. 어, 네, 잠시만요, 아, 이게 이렇게 계좌이체를 하는구나. 좋네요. 제가 이게 처음이라. 22,000원. 잊기 전에 얼른 숫자를 입력하고 지문을 꾹 눌렀다.
이렇게 좋은 게 있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좋은 분하고 또 거래를 하게 돼서... 그녀가 알콜스왑을 몇 개 꺼내더니 혹시 모르니 꼭 닦아 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만 2천원에 키보드에 마우스까지, 게다가 알콜스왑에 뽁뽁이에 다정한 수다까지. 나는 마스크 너머로도 잘 보이도록 눈을 휘어 웃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좋은 후기를 썼다. 그러면서 나에게 물건을 사 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5천 피스짜리 레고를 사고 부품이 3개 정도 없다며 환불을 요구하던 사람도 있었고 약속을 두 번 세 번 미루고 15분이나 늦게 나타난 사람도 있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부족한 물건을 받아 돌아가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 난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물건을 빨리 팔아 치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 보였을까? 어쩌면 그게 사실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뽁뽁이를 두겹 세겹 걷어내고 나니 말끔한 키보드와 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글자라도 더 쓰고 싶어지는 감촉이었다.
다음에 판매할 때는 나도 알콜스왑을 몇 개 챙겨야지.
가끔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모를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