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은 그만! 슬기로운 직장생활 NO.26
지하철을 타면 이상하게 주위를 보는 버릇이 있다.
오지랖인지 아니면 습관인지 모를 나의 이상한 행태다.
나의 출근열차는 6시 31분 고정적이다.
그걸 타고 7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군자역에 내리면, 문 열리는 순간 사람들이 우샤인 볼트처럼 일제히 뛰어나간다. (우샤인 볼트를 말하면 연식이 오래된 건가? 흐흠)
전광판에 7호선 열차가 한 정거장 전에 정차되어 있다면 환승시간은 2분 내외.
그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짧은 내 다리로는 남들 한 걸음 걸을 때 두 걸음 가기 위해 온몸으로 걷는다.
플랫폼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 그냥 냅다 뛰는 수밖에...
그렇게 열차를 겨우 타도 나 하나 앉을 자리는 없다. 만석이다.
그럼에도 앉을 가능성이 높은 자리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탐색해서 바로 그 자리 앞에 가서 선다.
한 사람 앞에 바로 서 있으면 내가 앉을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으면 내가 앉을 수 있는 확률은 배로 늘어난다.
남들이 알면 기도 안찰, 나만의 치밀한 계산을 끝내고 딱 서 있으면, 환승하는 역에 정차하는 순간 둘 중에 한 명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서 있는 내내 앉아 있는 사람을 주시하며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텔레파시 보낸 건 안비밀
나의 주술이든 확률게임이든 일단 앉으면 세상 편하다.
역시 직딩의 삶의 질은 출근에서 시작된다. 출근길이 그지 같은면 그날도 별로고, 출근날이 여유로우면 그날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가 좋다.
남들 두 다리로 힘들게 서 있을 때, 난 두 다리 편하게 앉아 가면 이상하게 묘한 승리감이 생긴다. ㅋㅋ
그날도 행운 만땅으로 앉아 가는데, 어떤 젊은 여자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걸 보았다.
기브스는 하지 않았다. 발 두 쪽다 멀쩡히 신발을 신었다 그것도 발 불편한 워커를...
바로 내 앞이 아니라, 내 자리에서 멀찍이 서 있어 누군가가 양보해주리라 생각했다.
아, 그때부터 내 마음은 갈등의 지옥이 된다.
'저 여자는 젊은데 왜 지팡이를 짚고 있지?'
'아무도 안하는데 나라도 자리 양보 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내가 저 여자 부르러 간 사이에 내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앉아 버리면 어떻게 하지?'
'지금 지하철 조용한데 내가 저 여자에게 자리 앉으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봐서 챙피한데?'
'그리고 운동화도 아니고 세상 불편한 워커를 신었는데 진짜 발 불편한 거 맞아?'
생각의 흐름을 보면 가관이다.
자리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고요한 전철에서 자리 앉으라는 그 말한마디가 챙피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국 안하겠다고 합리화를 한다.
내가 이렇게 소리 없는 아우성 칠 때, 젊은 여자는 지팡이를 짚으며 다음 칸에 넘어가 노약자석에 앉았다.
이제 내 마음의 갈등은 끝! 그때부터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젊은데 그냥 지팡이를 짚고 다녔을까? 패션 아이템으로? 분명 다리가 불편하기에 어쩔수 없이 지팡이를 짚은 것이다.
워커야말로 패션 취향이지, 그것 때문에 발이 불편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 자리 양보하지 않겠다는 나의 생각에 대한 합리화다.
발 불편한 사람도 멋지게 꾸미고 싶은 자유가 있다. 심지어 그게 발을 더 불편하게 할지라도...
아 불편하다.
아 부끄럽다.
챙피함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다.
자리에 앉으라는 그 말 한디가 챙피했고,
그걸 하지 못한 내가 내내 부끄러웠다.
내 마음이 불편해서 자리 양보하는 게 백배 나았다.
그 젊은 여자를 위한 게 아니다. 내 마음 불편한 게 싫기 때문이다.
나는 철저한 개인주의다.
봉사도 사람을 돕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돕는 내가 좀더 나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기에 봉사한다고 생각한다. (아 이건 TMI다.)
아, 인생 피곤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사나?
오늘 나의 자리 매너는 빵점이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다.
하지만 이렇게 쓰면서 나를 뒤돌아 보는 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들 마음이 불편하면 일단 써봐라. 한결 개운해질 것이다.
무조건 막 쓰면 된다.
왜이렇게 결론이 희한하게 났는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해피엔딩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