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잘한다는 것 (4)
성격검사 테스트는 다양하지만 국내에서 MBTI 만큼 유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성격적 특성을 단지 16가지 유형으로 심하게 단순화한다는 점, 실제 본인의 모습이 아닌 본인이 원하는 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모델이지만 또 검사 결과를 놓고 보면 나름 잘 맞는다는 분위기다. 재미로 보기 좋은 테스트다.
나의 경우 검사 결과는 보통 ISTJ나 INTJ로 나오는데 '계획'에 관한 특징이 눈에 띈다. 실제로도 그렇다. 계획하지 않는 것을 매우 불안해한다. 내 인생이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너무나 싫다.
그래서 뭐든지 미리미리 했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꼭 세웠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모범생 같은 나의 모습이 꽤 보기 좋았을 것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불안해서 계획을 세우니 스스로는 꽤 피곤한 삶을 살았다. 계획은 가끔 정말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하루가 정리되는 느낌을 반드시 가져야 했다.
이런 성격 탓에 회사생활이 늘 불안했다. 공부와 다른 느낌으로 일은 끝이 없었다. 내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정리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일정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한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이 가지를 치고 다른 일을 가져오거나 전혀 생뚱맞은 새로운 일을 얻게 되기도 한다.
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 새로운 일의 담당자가 되는 건 다반사다. 오늘의 일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일들은 자꾸 늘어나고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에서도 이슈가 발생한다. 두더지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또 지금은 조용하지만 앞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미리 대응방안을 마련해둬야 한다. 일은 정말 끝이 없었다.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일에 허우덕 거리다가 문득 남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관찰했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하루의 일을 딱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이, 내일은 내일의 가장 중요한 일이 있을 뿐 일이 끝난다는 개념은 사실상 없다. 다들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이 혼란을 정리할 수 없다면, 계획적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이 피곤한 직장생활을 좀 더 괜찮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혼란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을 자연스러워해야 한다. 수영을 배울 때 처음에는 물에 있는 것이 어색하듯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찝찝하고 어색하다. 하지만 소수의 축복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일을 그날그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일이 정말 없거나(부럽다..) 능력이 정말 좋은 경우다.
단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있다. 다른 일들을 제때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저자로서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바이지만 당신은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다. 당신의 초점을 방해하는 덜 끝난 일들과 미진한 부분들이 자기를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느껴져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다. (중략)
이런 일이 벌어지면, 즉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압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마음은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로 높은 생산성은 창출할 수 없다. 생산성을 빼앗아가는 가장 나쁜 도둑들 중 하나가 바로 이 혼란을 참지 못하는 태도나 혼란에 대처하는 창의성의 부재다.
사실, 성공과 혼란은 늘 함께 오게 되어있다. 위대함을 추구하다 보면 혼란은 반드시 일어난다.
-245p <원씽>
어느 순간부터 정리되지 않은 일 속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차근차근 일을 하며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끊임없이 미루더라도 큰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하지만 내가 살 방법은 중요한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익숙해지면 혼란 속에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훨씬 좋다. 계획은 세우되 그날 반드시 끝내야 할 것들을 제외하고는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한다. 혼란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