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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피 Aug 24. 2021

마케터의 일

마케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MBC 예능 <아무튼 출근>을 즐겨 본다. 다양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보여준다. 내가 살면서 마주칠 일 없는 직업들의 하루를 간접 경험하고 남의 직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케터도 많이 나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로그램 특성상 이벤트성의 업무는 보여줄 수 있지만 진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시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아는 회사 이름이 나오면 가능한 직무에 무작정 지원을 했다. 영업, 영업관리, 마케팅, 해외영업, 경영지원 등등...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하는 일이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해하는 척은 했지만, 잠깐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느낄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선배들도 일에 대해 이해도가 낮은 취업준비생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마케터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마케팅에 관련된 많은 책과 블로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경영학과 마케팅 원론을 다시 공부했다. 시간이 되면 대형마트나 드럭스토어에 가서 시장을 공부했다. 운이 좋게 신규 브랜드 및 신제품 개발과 광고 캠페인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마케팅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아예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영업과 마케팅을 구분하기 어려워하고 마케터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국내의 존재하는 수 만개, 수십 만개의 마케팅 명함 중에서 진짜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진짜 마케팅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일까? 브랜드 마케팅, 퍼포먼스 마케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즈, 광고홍보 담당, 트레이드 마케팅, 콘텐츠 마케팅 등등... 마케팅은 붙이는 게 이름이고 심지어 특정 회사에는 영업마케팅이라는 직무가 있다.


나는 브랜드 마케팅을 한다. 통상 BM(Brand Manager)나 PM(Product Manager)로 불린다. 3년 차다. 다른 마케터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속도가 빠르고 커버해야 하는 범위가 넓어서 무척 정신이 없다. 커버해야 하는 범위가 넓다는 의미를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소 CEO(small CEO)로서 기능을 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 내가 담당하는 품목과 브랜드의 책임자로서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1차적인 모든 책임을 진다.

예컨대 다음 주에 중요한 행사가 진행되는데 공장 사정으로 물건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다면? 담당 BM은 공장 측과 머리를 싸매서 물건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혹은 영업부와 머리를 싸매서 다른 품목으로 행사를 대체하거나 행사 내용을 일부 변경해서 사고가 안 나게 해야 한다.

중요한 행사를 거래처에서 갑자기 일방적으로 취소한다면? 담당 BM은 공장 측과 머리를 싸매서 생산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협의하거나 영업부와 머리를 싸매서 다른 판매처를 찾아봐야 한다. 과다재고는 담당 마케터의 책임이다(SCM 부서가 따로 있긴 하지만 결국 이들의 의사결정에는 마케터의 요청이 아주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마케팅과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재고 이슈도 결국은 담당 마케터가 해결해내야 한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이런저런 곳에서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때마다 무조건 머리를 싸매야 하는 사람이 바로 브랜드 마케터이다.


좀 더 인간적으로 설명해보자면 CEO라기보다는 담당 브랜드나 품목의 부모와 선생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교육시켜 아이를 사회에 내보낸다. 아이가 운동에 소질이 있다면 운동선수로, 게임에 소질이 있다면 프로게이머로, 때로는 가수로 사회에 나온다. 아이가 스스로 책임질 수 없을 때 사고를 치면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를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기르는 것 또한 부모와 선생의 책임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신제품을 출시하는 걸 '출산'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다. 담당 브랜드를 '내 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아이를 기르는 과정과 다른 것이 있다면 외모와 성격, 이를 통해 사회에 비치고자 하는 모습을 마케터가 미리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다.

신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가격을 결정해 출시하고 이를 더 눈에 띄게 하기 위해 적정한 판매처를 결정하고 프로모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고객과의 관계까지 관리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 마케터의 일이다. 실제로 일을 하다가 내 품목에 대해 좋은 코멘트를 받으면 뿌듯하고 나쁜 코멘트를 받으면 억울하고 슬프다. 소비자에게 어떻게 비칠까 두려워하면서 작은 것까지 하나하나 의사결정을 해나갈 때를 돌이켜보면, 그 제품과 동고동락을 하며 키워온 나는 내 품목의 부모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개념적으로 설명해보자면 마케팅은 결국 STP(Segmentation-Targeting-Positioning)를 해야 한다. 예산과 자원이 한정적이므로 우리는 시장을 세분화하고(Segmentation) 그중 표적시장을 선정해서(Targeting)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소비자 마음속에 포지셔닝(Positioning) 한다. 이런 STP를 하기 위해 시장조사가 선행된다. 최근 트렌드, 경쟁사 동향 등을 리서치한다. 리서치의 대상을 쉽게 이야기하면 3C(4C)다. 우리 회사(Company)의 자원과 역량을 살펴보고 소비자(Customer)를 들여다봐야 하며 경쟁사(Competitor)를 주시해야 한다. 최근에는 판매채널(Channel)의 고도화로 채널별 판매전략이 달라짐에 따라 채널까지 분석한다.

3C(4C)를 분석하면 이제 STP를 어떻게 실행하면 좋을까? 4P mix를 활용하면 된다. 4P에는 고객관계관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든 마케팅 활동이 들어있다. 제품(Product)의 에센스와 디자인, 스펙 등을 기획하고 가격(Price)과 유통채널(Place)을 결정하며 이를 촉진(Promotion) 한다. 다소 오래된 개념이기는 하지만 마케팅의 정석과도 같은 내용들이다. 대학시절 마케팅 원론 시험공부를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논리도 없고 추상적이어 보였던 개념들이 일을 하다 보니 서로 연관성을 띄고 다르게 다가왔다.

간단히 말하면 마케팅은 소 CEO 혹은 부모로서 3C(4C)를 분석해 4P를 실행하는 STP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마케팅을 하는 게 쉽지 않다. 사람들은 더이상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TV를 보지 않는다. 멀티미디어의 시대, TV는 배경음악이 되었다. 필요한 물건을 꼭 대형마트에 가서 구매하지는 않는다. 굳이 마트에 가지 않아도 신선한 재료와 특이한 신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TV광고와 브랜드 매니지먼트로 성공해왔던 P&G나 유니레버는 과거에 사용했던 전략 그대로 플레이할 수 없다. 과거의 포스를 잃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대기업의 브랜드들 또한 중소업체의 적극적인 온라인 시장 진입으로 파이를 빼앗기고 있다. 체계적인 전략보다는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소비자의 반응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소비자 조사를 진행할 수는 있지만 반응이 좋았던 신제품이 실제 시장에 나가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신제품의 성공은 복잡계(Complex System)이다. 5년 전, 그 누가 카카오라는 기업이 현대자동차보다 커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는 빠르게 움직인다. 몇 개월 뒤면 낡은 것이 되어버릴 트렌드를 재빨리 포착하고 신제품을 출시한다. 머뭇거리는 순간 늦는다. 대기업이 중소업체에 고전을 하고 있는 이유는 결정의 속도다. 아주 신중한 의사결정을 통해 수십 년간 쌓아왔던 회사 이미지를 보호하고 거의 완벽한 신제품을 출시해서 성공하고자 하는 기존의 일하는 방식은 시간이라는 자원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실패를 할 때 따라올 사람들의 비난과 문책성 인사발령이 두렵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신제품 개발 프로세스, 뛰어난 인재, 노력과 열정도 중요하지만 지금 대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문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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