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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피 Aug 24. 2021

의사결정권자는 절대적으로 옳은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직장문화 (1)

너무 뻔한 말이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신의 직장이었던 회사는 MZ세대에게 외면받는다. 고연봉과 정년보장보다 중요한 것은 워라밸, 기업문화, 경영진의 소통이다. 불공정한 인센티브 지급에 과감히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익명의 앱을 통해 회사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대안이 있는 젊은 직원들은 과감히 회사를 떠난다.


나 역시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것이 익숙해졌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직 많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가진 불만은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에 갇힌 사람들이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사들이 미웠다. 모르면 이제부터 알면 되겠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중하게 모르는 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해도 알려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내가 물어본 개념에 대해 자세히 몰라서 그랬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과정임에도 그때는 그게 참 불만이었다.


요즘은 나름 '담당자'로 일하면서 의사결정권자로부터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일이 많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이므로 대개는 직접 설명해야 한다. 일의 속도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프로세스지만 의사결정은 나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고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보고의 중요성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다만 프로세스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의사결정권을 무기로 본인의 권력을 과시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해 계속 추가적인 자료를 요구하는 결정권자는 직원들을 힘들게 만든다. 모든 결정을 한 사람이 하는 게 불만이다.


디자인 의사결정은 누가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은 디자인에 대한 것이다. 새로운 제품을 낼 때 마케팅 문구, 컬러감, 폰트 등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납득시켜야 하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디자인이 좋다 나쁘다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없고 만약 디자인이 좋다는 사실을 의사결정권자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정말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아닌 설명하기 편한 디자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웬만큼 기본기가 되어 있는 디자인이라면 좋은 디자인은 그냥 좋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이다.  


스타트업은 모르겠지만 나같이 오래된 회사에 다니는 경우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나이가 많다. 좀 더 대놓고 말하면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뻘이다. 타깃이 3040 여성인 제품의 디자인을 결정하는데 할아버지가 디자인을 선택하는 게 과연 맞을까? 설령 의사결정권자가 디자이너 출신이라고 한들 그 감각을 그 나이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FMCG 소비재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출시해 전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스마트폰이나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전제품보다는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시도를 해도 괜찮은 분야다. 나이가 많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천 원, 2천 원으로 전쟁하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는 FMCG 소비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을 리가 없다. 바쁜 그분들보다 실무자들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고민한다.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할 거면 일을 맡기지 말라


모든 의사결정권자가 전문가는 아니다. 우리 회사 의사결정권자는 대체로 소비재 분야에 무지하다. 회사 내 여러 사업부문이 있고 소비재는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의사결정권자는 소비재와는 큰 관련이 없는 다른 부서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많은 회사들의 의사결정권자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따라서 잘 아는 분야가 아닌 데다가 감각이 어느 정도 필요한 디자인에 대한 의사결정에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가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부서에 가장 오래 일하고 또 일을 잘하는 관리자, 실무자의 말을 많이 듣고 이 정도 의사결정은 과감하게 위임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의사결정권자들이 몇몇 사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위임(delegation)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리더들이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거다. 뽑은 직원을 믿지 못한다. 의사결정권자가 실무의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하면 직원들은 더 이상 주체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일이 재미가 없다. 

과감하게 위임해보자. 컨설턴트가 되어주자. 일의 속도가 빨라지고 일에 재미를 붙인 직원들이 신나게 일을 할 것이다. 


슬프지만 나는 내일도 소비자가 아닌 의사결정권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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