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기 위해 떠났다

다시, 일상

by 송하루

다시 돌아온 일상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거창한 결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사실만 분명했다.

한국에서의 하루하루가 나를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왔다.

도저히 못 살겠으면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이곳은 내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출구였다.

계획이 있어서 떠난 게 아니라, 계획을 세울 힘조차 없어서 떠났다.


끝난 사람처럼 살았던 시간들

암 수술을 다섯 번 했다.

항암 치료를 두 번 받았다.

이혼을 두 번 했다.

병실의 하얀 천장을 보며 하루를 보냈고, 법원 대기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시간을 견뎠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해야 했던 일상들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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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 있으면서도 끝난 사람처럼 보냈다.

더 이상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사람.

그냥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

그래서 떠났다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은 생각할 힘이 없었다.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웠다. 암 환자라는 꼬리표, 이혼녀라는 시선,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

나는 그 무게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무게에 눌려 사라지기 전에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서 다시 살아났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밤, 나는 작은 호텔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소음. 오토바이 엔진 소리, 거리의 떠드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한국에서는 늘 조용했다.

병원은 조용했고, 법원은 조용했고, 혼자 있는 집은 너무 조용했다.

그런데 여기는 시끄러웠다. 살아 있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안도했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모른다."

아무도 내 과거를 묻지 않는 이 낯선 곳이 나를 살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오늘은 커피를 마셔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돌아왔다. 병원 예약이 아니라, 이혼 서류가 아니라, 그냥 하루를 고민하는 평범한 생각들.

나는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기적인지 알고 있다.

무너져 본 사람만이 평범함의 무게를 안다.

시장에 가서 이름 모를 과일을 샀다.

카페에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을 구경했다.

낯선 언어를 들으며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여기서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도시의 거리는 늘 시끄럽고 정신없다. 오토바이들은 규칙 없이 달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인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고, 비좁은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여기서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삐걱거려도, 길을 헤매도,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

한국에서는 늘 누군가의 전처였고, 환자였고, 실패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동정하거나, 피하거나, 혹은 무언가 교훈을 얻으려 했다.

여기서는 그냥 이름 없는 여자였다.

아무도 내 과거를 몰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에서 조금씩 나를 다시 꺼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부서지지 않게.


다시 일상을 배우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일상을 배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는 것.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

길을 걷다가 문득 웃는 것.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미소 짓는 것.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한국에서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견디고 있었다.

여기서는 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삶을 포기하려고 떠난 곳에서 삶이 돌아온 이야기.

도망이 생존이 된 이야기.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두렵고, 냉소적이고, 서툴다.

때로는 다시 무너질 것 같고, 때로는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진다.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다.

**나는 다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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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숨 쉬는 법.

다시 웃는 법.

다시 사람을 믿는 법.

그리고 다시 나를 믿는 법.

도망은 끝이 아니었다.

도망은 나를 살린 가장 조용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선택 이후의 일상을 살고 있다.

완벽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일상을.

때로는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일상을.

아프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일상을.


이 도시의 거리는 오늘도 시끄럽고 정신없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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