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인생이 따뜻해졌다
전화기를 켤 때마다 보이는 숫자가 있었다. 1613. 한때 내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던 사람들의 수였다.
직장 동료, 동창, 친구, 지인,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아는 사람들'.
하루에 100통이 넘는 전화를 받고 걸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카톡 알림이 수백 개씩 쌓여있었고, 점심시간에도 통화 중이었고, 밤늦게까지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 숫자는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전화기에는 단 3명의 번호만 남아있다.
7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은 암 진단과 두 번의 수술, 그리고 두 번의 항암치료로 채워졌다.
처음 의사가 "암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직 젊었고, 건강했고, 앞으로 할 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무엇보다 하루 100통씩 걸려오던 그 전화들에 응답해야 했으니까.
첫 번째 수술 후, 연락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힘내", "빨리 나아", "기도할게". 따뜻한 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답장을 보내며 괜찮은 척했다. 정말 괜찮을 줄 알았다. 곧 다시 그 바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항암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중이 급격히 줄었고,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졌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끝없는 피로와 메스꺼움이었다. 하루 100통씩 받던 전화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50통, 30통, 10통... 처음엔 '내가 바빠서 못 받아서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은 응답이 없는 번호에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약속을 잡아도 취소하기 일쑤였고, 전화를 받을 기력도 없었다. "다음에 전화할게"라는 말이 점점 미안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도 "다음에"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사라져갔다. 조용히, 천천히.
다섯 번째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를 거치며 "이제 괜찮을 거야"라는 희망은 점점 작아졌고, 다섯 번째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렵, 결혼생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우자는 말했다.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 병과 싸우느라 배우자를 돌보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를 돌보는 것조차 버거웠던 시간이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나는 혼자 병원 복도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0건. 하루 100통씩 울리던 그 전화기가 이렇게나 조용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1613명이라는 숫자는 한낱 환상이었다는 것을. 정말 힘들 때, 정말 무너질 것 같을 때, 곁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연락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년 넘게 연락하지 않은 사람들, 내 안부를 묻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아팠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숫자는 줄어들었다. 1200명, 800명, 500명... 그리고 마침내 3명만 남았다.
그 3명은 매일 아침 "어제 잘 잤니?"라고 물었다. 별것 아닌 질문 같지만, 그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나는 많은 날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앞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조심스럽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예전처럼 수다를 떨었고, 나는 그 평범함이 감사했다. 내가 절망할 때마다 "지나갈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말들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과연 하루 100통의 전화를 받던 그때가 더 행복했을까? 생일이면 수십 개의 축하 메시지가 왔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느라 정신없었고, 각종 모임과 약속으로 일정이 빼곡했던 그때.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고, 식사 중에도 통화를 하고, 화장실에서도 문자를 확인하던 그때. 그때의 나는 정말 풍요로웠을까?
아니, 나는 그저 바빴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아무와도 진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100통의 전화 중에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전화가 몇 통이나 됐을까. 1613명 중에서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까.
지금 나는 안다.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1613명의 '아는 사람'보다 3명의 '진짜 사람'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하루 100통의 전화보다 단 한 통의 "잘 자고 있니?"가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외롭지 않냐고. 전화기가 조용하지 않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전혀. 오히려 지금이 더 충만하다고. 예전에는 수백 통의 전화 속에서도 외로웠다.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록 3명뿐이지만, 그들은 내 가장 어두운 순간을 함께 견뎌준 사람들이다. 내가 무너질 때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다.
암은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건강, 결혼생활, 그리고 1610명의 연락처. 하루 100통의 전화벨 소리도. 하지만 동시에 가르쳐주었다. 무엇이 진짜인지, 누가 진짜인지를. 소음과 고요의 차이를. 바쁨과 충만함의 차이를.
요즘 나는 연락처에 새로운 번호를 추가하지 않는다. 대신 그 3명에게 더 자주 연락한다. "오늘 뭐 했어?", "밥은 먹었어?", "날씨 좋다, 산책할래?" 같은 평범한 말들을. 그리고 그들도 내게 똑같이 물어온다. 하루에 세 통의 전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나는 안다. 인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아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1613이라는 숫자는 내 인생을 채우지 못했지만, 3이라는 숫자는 충분히 따뜻하다. 하루 100통의 전화벨은 시끄러웠지만, 하루 세 통의 진심은 평온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문자가 왔다. "잘 자고 있니?" 나는 답장을 보낸다. "응, 잘 자고 있어."
연락처 속 이름들을 보며 미소 짓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번호들이다.
오늘의 첫 번째 전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전화일 수도 있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