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리적 ‘볼일’이 아닌 것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애초 용무를 빠르게 마친 나는 SNS를 훑어보며 하트를 누르거나 의미 없는 웹 서핑을 했다. 때로 무음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단순한 모바일 게임을 하기도 했다. 눈치챘겠지만 그곳, 화장실 얘기다.
아이들의 소란을 피해 화장실을 육아의 대피처로 삼는 행위는 나의 꽤 오래된 습관이었으나 도쿄의 집에 머무르는 시기 좀 더 노골적으로 강화됐다. 한국과 달리 욕실과 분리된 일본의 건식 화장실은 좀 더 휴식 공간으로서 적합한 구조를 가졌다. 물기 없이 깨끗(?)하고 안온한 1평 남짓한 공간에선 조용히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집에 따라선 새 소리나 클래식 음악이 들리기도 한다)가 났고, 엉덩이에 닿는 감촉은 따뜻했다.
장인정신을 높이 사고 디테일에 강한 일본인들이 진심을 다해 만드는 것들은 무척 많다. 라면에 진심, 꽃꽂이에 진심, 정리에 진심, 목욕에 진심, 포장에 진심, 줄 서기에 진심 등등… 하지만 나는 그 일본의 수많은 진심 중 정수는 화장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건 애초 내 생각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30년대 쓰인 그의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에서 이미 ‘고풍스럽게 어둑어둑한 그러면서도 깨끗이 청소된 변소로 안내될 때마다, 정말로 일본 건축의 고마움을 느낀다’면서 ‘다실도 좋기는 하지만, 일본의 변소는 참으로 정신이 편안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며 일본식 화장실을 찬미한 적 이 있다.
사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살았던 시대의 변소는 현대의 화장실과 다른 형태였을 테지만 어쨌건 화장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기본 태도는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확실히, 화장실에 진심이다. 일본인들은 생리적 행위를 앞둔 고독한 개인들을 위해, 화장실의 크기, 조도, 소리까지 꽤 오랜 기간 신경을 써 개발해 왔다. 일본의 변기는 미국의 그것보다 막힘이 덜한 것으로 한 때 명성을 쌓았다. 일본의 공중 화장실에는 생리적 현상으로 나는 소리를 가리고자 ‘오또히메(소리 공주)’라는 시스템이 있다.국제결혼으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내 일본어 선생님 한분은 "처음 한국에 와서 공중화장실에 오또히메가 없어서 당황한 적이 있다"라고 해서 당시까지 이 기기를 무용한 것으로 여겼던 나를 문화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다.
무엇보다 일본은 현대식 비데 워시렛을 처음으로 개발해 보급한 나라다. 일본 가정의 워시렛 보급률은 PC 보급률보다 높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필수적인 가전이다.
물내림 버튼과 비데는 물론 변기커버 소독제, 오또히메, 노약자를 위한 손잡이 지지대 등으로 빼곡한 공중화장실.
풍부한 취재를 통해 화장실의 사회 문화적 의미를 분석한 책 ‘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진지하게’에서 저자인 로즈 조시는 “한 사회가 인간의 분뇨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그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이 책의 10분의 1을 할애해 1980년대 일본 변기 회사들의 비데 개발 스토리를 다루는데, 특히 내가 흥미진진하게 읽은 것은 비데의 효과적인 노즐 각도를 찾아내기 위해 일본의 변기 회사 토토 직원들이 들인 노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당시 개발자들은 평균적인 항문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는데, 결국 이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토토의 직원 300명은 변기에 앉아 시트에 담긴 표시줄에 종이조각을 붙여 자신의 항문 위치를 표기해 전달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비데의 노즐을 볼 때마다 비장한 마음으로 킥킥거린다.
일본의 호텔에서 갑작스러운 요의를 느끼고 깜깜한 화장실에 들어가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불빛을 비추며 자동으로 뚜껑을 부드럽게 열어주는 변기를 마주한 적 있을 것이다. 이런 변기는 도쿄의 우리 집에도 있었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기능은 열 시트였다. 바닥 난방이 안돼 겨울이면 유난히 추운 일본식 집에서 따뜻한 변기에 앉아있을 때면,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집안 청소 안 하기로 유명했던 나는, 화장실 청소만은 꽤 열심히 했다. 화장실 청소 도구 역시나 다양해서 일본식 이케야인 니토리에 가면 진기한 청소도구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빔 벤더스 감독이 도쿄 화장실 청소부를 주제로 만든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화장실 건축물은 사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들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로 탄생한 화장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안도 타다오(왼쪽), 반 시게루(오른쪽) 등이 설계에 참여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앞서 도쿄에서 해당 건축물 중 몇 군데를 구경삼아 가본 적이 있다. 사실 기대했던 것만큼 그다지 막 혁신적인 느낌이거나 깨끗했던 것은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어쨌건 일본인들은 화장실로 한 번 더 화제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 프로젝트 혹은 영화를 소개하며 많은 해외 매체들은 또다시 일본의 화장실에 대해 ‘the world’s great toilet culture’(이코노미스트) 같은 표현을 썼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화장실 소프트 파워’로구나. 일본은 진심으로, 화장실에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