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린이날 우리 가족은 도쿄 스카이트리 포켓몬센터에 있었다. 포켓몬스터의 열혈 팬인 둘째의 취향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도쿄 주요 관광지 곳곳에 위치한 포켓몬센터는 포켓몬 캐릭터 상품과 포켓몬 게임기가 집합해 있는 매장이다. 원래도 붐비는 포켓몬센터는 5월 5일에는 더욱더 붐볐다. 일본 역시 5월 5일은 어린이날이기 때문이다.
포켓몬센터 앞에 선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 그리고 어린이 같은 어른들… 건물 바깥까지 구름 같은 인파가 새어 나왔다. 그 위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잉어 모형이 펄럭거렸다. 일본 어린이날 풍습인 코이노보리(鯉のぼり)다.
5월의 도쿄 스카이트리와 코이노보리. 634m의 송전탑인 스카이트리는 도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일본에서는 어린이날이 있는 5월 이렇듯 잉어 모형 깃발을 하늘에 걸어두는 코이노보리를 한다. 잉어 모형을 걸어두며 아이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히 자라도록 비는 것이다. 예로부터 잉어는 입신출세를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나는, 하늘에서 펄럭이는 잉어들을 보며 엉뚱하게 다른 걸 떠올렸다. 잉어킹, 최약체 포켓몬스터 말이다.
‘도움도 안 되고 한심하지 너무도 유명해 너무 약해서. 먼 옛날에는 엄청 강했대. 그런 소문도 있다지만 지금은 너무나 약하단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약하단다. 약한 포켓몬 잉어킹. 세상에서 가장 약한 녀석. 약한 포켓몬 잉어킹. 너무나 약해서 쇼킹.(중략)’ -<I love 잉어킹> 중
포켓몬 팬의 엄마로 살다 보면 어쩔 수없이 피카츄 외에도 유명한 포켓몬 캐릭터 몇 개는 알게 된다. 포켓몬 창조의 신 아르세우스라던지, 환상의 포켓몬 뮤라던지 주로 세거나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
그런데 잉어킹은 좀 내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이 캐릭터를 알게 된 것은 저 ‘I love 잉어킹’ 노래 때문이었다. 단순한 멜로디와 무심한 목소리, 거기에 애정인지 조롱인지 애매한 가사. 대체 어떻게 생긴 캐릭터길래, 찾아봤더니 심지어 귀엽지도 않았다.
온라인에서 떠도는 설명에 따르면 잉어킹은 ‘튀어 오르기만 하는 한심한 포켓몬’이다. 힘도 스피드도 거의 없다. 그런데 보통 이런 캐릭터들이 그렇듯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졌다. ‘번식력이 엄청나서 질릴 정도로 눈에 띈다’고. 보통 게임에서 이 캐릭터를 접하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잡지 않는다. 포켓몬 카드를 모았던 아이는 잉어킹이 그려져 있으면 대부분 그냥 버렸다. 둘째가 말했다. “엄마 그건(잉어킹) 나오면 그냥 버리는 거야. 그런데 아주아주 오랫동안 사탕을 주면 갸라도스가 돼.”
갸라도스는 용을 닮은 힘센 캐릭터다. 고사 ‘등용문’을 모티브로 한, 용이 된 잉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잉어킹이 그토록 튀어 오르기만 한 것은 알고 보면 협곡을 뚫고 용이 되기 위해서였구나. 다만 갸라도스로 진화하려면 무려 사탕(아마도 일종의 포인트 아닐까 싶다) 400개가 필요하다는데, 이건 아무래도 꽤 큰 인내심이 필요하며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인 것 같다. 둘째의 말을 듣던 첫째가 덧붙였다. “그런데 진짜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그냥 버리는 게 나아.”
나는 거센 협곡을 뚫기 위해 팔짝팔짝 뛰어올랐던 수많은 잉어들을 떠올렸다. 그중 어떤 잉어 한 마리는 등용문을 통과해 갸라도스가 됐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튀어 오르기만 하는 한심한 포켓몬 잉어킹으로 남았다.
하필 한국어 발음 잉여와도 유사한 것이, 왜 나는 이 캐릭터가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것인가. 나는 포켓몬센터 앞 긴 줄에 서서 괜히 잉어킹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나만 느낀 것 같진 않다. 굳이 이 쓸모없는 포켓몬을 위해 노래까지 만들어주며 기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바람에 출렁이는 코이노보리를 보면서 일본어 좀 하는 남편은 말했다. “사실 일본어로 코이(こい)는, 잉어(鯉)를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사랑(恋)이라는 뜻도 있지.”
그래, 말장난이라도, 잉여보단 사랑이 낫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5월 도쿄의 하늘엔 잉어킹과 사랑이 함께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