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둥글게
Tokyo Keyword / 할머니 おばあちゃん
혹시 ‘커브스(curves)’를 아시는지. 일본식으로는 카-부스(カーブス)로 불리는 이 브랜드는 여성 전용 피트니스클럽 체인이다. 서울에서도 이 브랜드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도쿄에는 그 수가 더 많은 듯했다. 맨션이 모여 있는 도쿄 주택가 상가 곳곳에서 커브스의 보라색 로고를 자주 볼 수 있다.
도쿄에서 지내는 한동안 커브스를 다녔다. 내게 커브스를 소개해준 당시 다니고 있는 일본어교실의 G 선생님이었다. 자원 활동으로 외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G 선생님은 해외 경험이 많고 영어가 유창한 70대 할머니다. 늘 꼿꼿한 자세로 활기차게 수업을 진행했는데 우아한 카리스마 있었다. 나는 종종 G 선생님을 내 노년의 롤 모델로 삼고 싶다는 마음을 품곤 했다.
“oo상, 내가 카-부스 소개해 줄까요?”
일본어 수업에서 운동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G 선생님이 물었다. 선생님은 우리 동네 커브스의 오랜 회원이었다. 함께 수업을 듣는 미국인 M 할아버지는 ‘여성 전용’이라는 말에 흥미로워했다. 커브스는 미국에서 시작된 브랜드라는데 그에겐 생소한 듯했다. ‘카-부스’가 영어 curves의 일본식 발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으흠, curves?”라고 되물으며 항아리 모양 곡선을 손으로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뒤 선생님은 내게 회원 추천 체험 쿠폰을 전해줬다. 체형과 체력을 진단해 주고 1회 무료체험을 할 수 있는 쿠폰이었는데 추천 회원란에 선생님 성함이 손 글씨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 동네 커브스에 전화예약을 하고 일주일 뒤, 나는 처음으로 커브스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람바다’ ‘마카레나’ 같은 1980~90년대 댄스음악이 울려 퍼지는 2층 체육관은 30명 남짓한 여성들로 북적거렸다. 체육관에는 가운데 둥그렇게 10여 개의 운동기구들이 배치되어서 있었는데 그래서 언뜻 보면 한 무리가 ‘둥글게 둥글게’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첫눈에 초고령 사회 일본의 위엄을 느꼈다. 운동을 하는 여성의 다수는, 추정컨대 70대 이상으로 보였다. 40대 초반인 나는 몇몇 트레이너를 제외하면 이 공간의 꼬꼬마였다. 노출 있는 옷을 입고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피트니스센터에선 레깅스는커녕 반바지를 입은 여성조차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들 당장 마트에 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이는 긴 면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다. M 할아버지, 안타깝게도 이곳에 상상하시는 곡선 따윈 없습니다요. 오히려 커브스란, 저 ‘둥글게 둥글게’를 말하는 게 아닐까 홀로 추정했다.
일본의 커브스는 간판부터 이곳이 ‘오바짱(おばあちゃん·할머니)’의 공간임을 천명한다. 우리 동네 커브스의 경우 체육관 바깥 간판에 대략 60대 전후로 보이는 여성들이 목에 땀수건을 건채 한쪽 무릎을 굽히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환하게 웃는 사진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날 오전 내가 체육관 안에서 목격한 여성의 상당수는 이 간판 속 모델보다 연배가 있어 보였다.
체육관의 벽 한구석에는 커브스 등록 전과 후, 이른바 ‘비포&애프터’ 사진을 내건 회원들의 체험기도 가득 붙어있었는데 그간 다양한 다이어트 광고에서 보았던 그 간증들과 유사한 형식이었다. 차이라면 간증자들의 나이대가 50~70대로 높고 그 효과가 다이어트 광고보다는 덜 드라마틱해 오히려 신뢰감을 높인달까. 60대 회원 한 분은 4개월 만에 내장지방 감소를 통한 체중 3kg 감량과 허리 치수 6.1cm 감소의 효과를, 50대의 또 다른 분은 8개월 만에 몸무게 8kg, 허리 치수 8cm 감소 효과를 봤다고 한다. 50, 60대 체험기가 신체 수치 변화를 강조한 것과 달리, 70대 체험기에는 ‘이제 허리를 좀 더 곧게 펼 수 있다’ 거나 ‘걸을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같은 증언이 많다는 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이곳의 다수인 70대 분들이 이 체험기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예컨대 나는 어떤 20대가 몇 개월 만에 10kg 감량에 성공했다는 홍보 글을 읽으면 ‘그 나이엔 그게 쉽지,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면 늙어서 고생이지’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70대가 보는 50대의 성과도 비슷할까.
어쨌건 내겐 저 인생선배들의 체험기가 꽤 자극이 돼 1회 체험 후 정규등록을 하게 됐다. 체형 측정에서 40대 평균에 비해 과한 내장지방과 부족한 체력을 수치로 목도한 후 50~60대 선배들도 내장지방을 저렇게 줄였다면 40대인 나는, 어쩌면 ‘철을 씹어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물론 첫 상담 직후 등록할 경우 입회비가 50%라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게 등록의 결정적이긴 계기가 됐지만 말이다.
커브스는 여성전용공간이라는 점 외에 30분 순환 운동이라는 특징을 내세우고 있다. 체육관에는 각기 다른 기능의 근육 운동기구 13개가 빙 둘러 놓여있고 그 사이사이 점핑 보드 13개가 함께 놓여 있는데, 회원들은 30초간 근육운동을 한 후 이후 30초는 각각의 보드에서 유산소운동을 하며 호흡을 고르고, 또 시간이 되면 다른 근육운동기구로 옮겨가는 식으로 ‘둥글게 둥글게’ 총 두 바퀴를 돌면서 30분을 보낸다. 친절하게도 매 30초가 끝날 때마다 스피커에서는 미국 여자 AI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우, 체인지 더 스테이션!(now change the station·이제 자리를 바꾸세요)”
우리 동네 커브스의 운동기구들은 대체로 아담했다. 묵직한 포스가 느껴지는 기존 헬스장의 기구들에 비하면 크기는 작고 무게도 가벼운데, 어쨌건 이 기구들을 이용해 할머니들이 취하는 자세는 벤치프레스나 데드리프트, 스쾃 같이 흔히 보아왔던 그 기본 동작들과 유사하다. 백발에 허리가 꽤 굽으신 할머니가 이런 동작을 하는 모습은 꽤 신선했다. 비록 기구에서 다른 기구로 옮겨가는 시간이 좀 더 걸려 30초보다는 25초 운동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생각보다 경쾌하게, 각종 기구를 섭렵했다.
내게 사용법을 설명해 준 트레이너는 이곳의 운동기구가 유압방식으로 개개인의 체력이나 컨디션에 맞춰 무리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정확한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일부 기구의 동작을 빠르게 할수록 좀 더 버겁게 느껴졌는데 속도를 높일수록 무게감을 강화시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좀 강한 효과를 원한다면 빠른 속도로, 무리를 하지 않고 싶다면 쉬엄쉬엄,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수준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인생이 그렇듯 말이다.
할머니들의 유산소 운동 모습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음악에 맞춰 콩콩 뛰면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회원들이 걷기 혹은 걸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0초씩 4번의 심박수 측정 시간도 있다. 20여 명의 여성들이 손목 혹은 목 주변에 손가락을 얹고 맥박체크를 하는 모습은 무척 비장하다. 벽 곳곳에 붙어있는 나이대별 심박수 표에 따르면 40대 초반인 내 경우 운동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심박수가 10초당 20~24회 정도다. 나이가 들수록 목표 심박수는 낮아진다. 일본 특유의 친절함이 돋보이는 심박수 표는, 너무 무리를 해 심박수가 지나치게 빠르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무리하지 말고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제안한다. 이렇게 체육관 두 바퀴를 돌면 대략 26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나머지 시간을 스트레칭을 하면 약속했던 30분이 마무리된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곳에서의 30분은 빠르게 지나갔다. 체육관 벽 곳곳에는 빨간 글씨로, 근육의 중요성이나 꾸준한 운동효과를 강조하는 “30세 이후부터 매년 1% 씩 줄어드는 근육” “주 1회라도 한번 운동하면 300kcal 소비, 1년이면 48회, 지방 2kg 분량” 같은 구호들이 가득했는데 더듬더듬 이런 문구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훌쩍 마지막 단계에 이르곤 했다.
이들 게시물 중에서 특히 내 흥미를 자극한 것은 체육관 구석의 ‘연령대별 랭킹’ 표였다. 손으로 그린 그래프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표기되진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7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다음으로 많은 연령대는 60대, 그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연령대는 50대가 아닌 80대였다! 이곳에서 80대 회원은 30~50대보다 많고, 90대 역시 20대보다는 많다.
90대라니, 나는 몇 해 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노화연구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정신과의사 와다 히데키는 그의 책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을 때보다 신체능력이나 건강상태에 개인차가 커진다”라고 했다. 초등학생의 지능지수나 달리기 속도는 80대 노인의 그것에 비하면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오랜 기간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신 할머니 또래가 이 공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커브스에 장년층 여성들이 몰리는 이유가 뭘까. 접근성이 좋고 비용 부담이 적다는 장점(2023년 기준 우리 돈 8만 원 정도의 입회비를 제외하고 1년 등록을 할 경우 월 6만 원 정도 비용이 드는데 원한다면 주 5일 내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이 있지만 최근 일본에서 편의점과 비슷한 콘셉트로 24시간 운영되는 월 2~3만 원 대 체육관 프랜차이즈가 유행하는 상황을 보면 큰 메리트 같진 않다. 그보다는 30초씩 끊어가는 30분의 짧은 운동시간, 큰 무리를 주지 않는 진행 방식이 매력적인 요소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딱 30초만 견디면 ‘이제 단계를 바꿀 때’가 되고, 그렇게 두 바퀴를 돌다 보면 오늘도 몸에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주니 말이다.
더불어 나는 커브스에 좀 자잘하면서도 친절한 관리시스템이 있다고 느꼈다. 예컨대 출석 도장을 찍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출석률이 높은 회원은 티셔츠나 단백질 셰이크 같은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 늘 웃는 표정인 트레이너들은 원을 따라 오가며 회원들이 아랫배나 엉덩이에 좀 더 힘을 주도록 돕고,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어색하지 않게 던지며 꾸준한 운동을 독려한다(“이번 주 몇 번 오셨나요? 오 3번이나! 정말 잘하고 계세요!”).
특히 매달 말이면 그달의 성과를 측정하기 위해 체중과 체지방율, 허리둘레와 배 둘레 등을 재는데, 이곳의 트레이너들은 그럼에도 무척 칭찬에 후했다. 무절제한 식사로 체중이 2kg 가까이 늘어났지만 허리가 0.5cm, 체지방율은 0.5% 줄었다면서 큰 독려와 박수를 받는 식이다(사실 허리치수는 트레이너들이 줄자로 직접 재주는데 그 과정에서 오류가 좀 있지 않을까 의심도 했다).
또 언젠가는 몸무게 증가뿐 아니라 체지방률도 동시에 높아져 누가 봐도 지방만 둥실하게 증가한 결과가 나왔는데, 당시 나보다 더 당황하고 실망하는 트레이너의 모습에 괜히 미안해져서 “혹시 생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아무 말이나 던진 적이 있다. 60대 정도로 추정됐던 트레이너는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그렇군요! 역시 젊네요!”를 연발하셨다. 아직 가임기라는 사실만으로 칭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얼마만큼의 다이어트 성과를 거뒀는지를 누가 묻는다면 사실 좀 민망한 결론이다. 주 3회가 아닌 주 2회를 다녔고, 그중 한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한 휴가를 다녀온 탓도 있을 것이다. 체지방과 근육량의 구체적인 변화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몸무게만 보면 나는, 그저 좀 더 건장해졌다. 그러니까 나이만 믿고 까불면 안 되는 거구나, 반성했다.
하지만 깨달은 것도 있다. 할머니들의 노화는 각양각색이었다. 운동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 전부는 아닐 거다. 개개인의 노화의 원인, 속도는 모두 다르게 진행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쳤다.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할머니들은, 그럼에도 꾸준히 커브스에 나와 관리를 했다. 근육 보조를 위한 단백질을 마시고, 람바다를 들으며 활기차게 자리를 옮겨갔다. 결국 배운 것은 그거다. 우리의 노화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둥글게 둥글게 하루 30분씩 다음 자리로 나아가주는 편이 좋다는 것. “나우, 체인지 더 스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