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사는 한국인 번역가 지인은 언젠가 “일본어 배우기에 구몬교실 만한 곳이 없다”라고 했다. 어느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후 나는 일본에 살게 되면 아이들을 구몬교실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쿄에 온 직후부터 ‘일본에서 구몬 하는 법’을 검색했다. 보통 구몬을 비롯해 대부분의 학습지 선생님이 학생의 집에 방문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동네마다 구몬교실이 있고 일주일에 한두 번 이곳에 찾아가 문제집을 풀고 숙제를 받아오는 시스템이다.
도쿄의 한 구몬교실 담에 붙은 로고.
일본 구몬의 로고는 아이가 그린 듯, 약간 찌그러진 큰 원 안에 점 세 개로 눈과 입을 표현한 모양이다. 다소 뚱하다 싶은 표정인데, 내 숏츠 알고리즘에 자주 뜨는 중국계 미국 코미디언 지미 양은 구몬센터에 대해 “동양 아이들의 구치소 같은 것”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로고 속 아이 표정이 “웃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웃는 게 아닌 것 만 봐도 알 수 있다”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는 내게 이 로고 속 표정은 골몰히 사색하는 똘똘한 어린이 같아 호감이 갔다. 바라보는 자리가 다르면 감상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동네 골목을 지나다 간혹 구몬교실을 발견하면 우리 집과 거리가 걸어서 어느 수준인지를 가늠하고 교실 앞에 놓인 홍보용 리플릿을 습관처럼 가져오곤 했다. 그러나 이런 내 열의와 정성에도, 한국에서 이미 밀린 학습지로 인해 잔소리에 시달렸던 우리 집 어린이들은 구몬교실을 완강히 거부했다. “싫어, 그렇게 좋으면 엄마나 해~”
체험이나 한번 해보자고 아이들을 설득하다 실패한 어느 날, 나는 정말 나만이라도 구몬교실에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주 2회 동네 일본어교실을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배움이란 원래 끝이 없는 것. 무엇보다 또래 어린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이곳의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좀 궁금했다.
고심 끝에 내가 결국 찾은 곳은 둘째가 다니는 스포츠센터 인근에 있는 구몬교실이었다. 골목길 작은 상가 1층에 위치한 자그마한 공간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학습지를 풀고 있는 모습을 눈여겨봤던 터였다. 스포츠센터와 가까워서 상당수 이 동네 아이들은 학교->구몬교실->수영/체조/댄스코스 등으로 움직였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수영장 등으로 빠져나간 어느 오후에 나는 이 교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여기서 일본어를 배울 수 있을까요? 아이 말고, 제가요.”
알고 보니 일본에선 나 같은 외국인들이 언어를 배우기 위해 구몬교실을 찾는 경우가 있고, 이 때문에 외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재가 따로 있다고 한다. 친절하신 동네 구몬 선생님은 이곳에서는 외국인용 교재를 취급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교실의 위치를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둘째의 수영강습을 기다리느라 비어있는 시간 동안 인근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가진 나는 혹시 괜찮다면 일본 현지 어린이들이 푸는 교재로 배우고 싶다고 간청해 결국 허락을 받았다.
이튿날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된 레벨테스트. 다섯 명 선생님과 스무 명 넘는 아이들로 빽빽한 교실 한구석에 놓인 책상 사이로 큰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갈 때 나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아주 조용히 나를 따라오는 것을 감지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문제를 푸는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힐끔힐끔, 커다란 이방인을 훔쳐보았다.
그렇게 소리 없이 떠들썩하게 자리에 앉은 나는 내 앞에 놓인 시험지를 펼쳐 보고 다소 당황했다. 일본의 알파벳인 히라가나를 체크하는 첫 장을 지나 둘째 장에는 여우와 고래, 오이, 그리고 삿갓 같은 걸 쓴 연두색 오리를 닮은 생명체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래 빈칸에 각각의 이름을 쓰는 단순한 문제.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처음엔 ‘오이’ 외엔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다행히 요 몇 년간 인기를 끌었던 여우 로고 브랜드명을 기억해 내 ‘여우’는 간신히 답을 쓸 수 있었는데 ‘고래’는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본 상상의 동물 갓파. 요괴지만 오이를 좋아한다고. (출처: てがきっず)
무엇보다 저 삿갓 쓴 병아리인지 오리인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초록색인걸 보면 파충류인가? 난감해하는 내게 선생님이 “그 문제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나는 미련 없이 포기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오리 닮은 생명체는 일본 전래동화 등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요괴 갓파였다. 대머리와 새의 부리, 거북의 등껍질, 물갈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내가 삿갓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대머리에 머리카락이 삐져나온 것이었다. 그래, 외국인이 한국어로 용이나 구미호 같은 건 잘 모르지 않겠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제는 내가 이 테스트에서 갓파 외에도 외국어나 외래어를 쓸 때 사용하는 문자인 가타카나 몇 개도 떠올리지 못해 틀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참고로 당시는,내가 턱걸이긴 했지만 일본어능력시험(JLPT)에서 2급을 땄던 직후였다. JLPT 홈페이지에 따르면 2급은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나 해설 평론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실상은, 한국어로 치면 아직 한글을 다 떼지 못했고 고래 같은 동물 이름도 잘 모르는 외국인 아줌마였다.
이런 내 모습이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아이에게도 충격이었나 보다. 2, 3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영어로 “Does your mother have a bag?"류의 문장을 쓰고 있었는데, 힐끗 내 시험지를 보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아이에게 뭔가 증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좀 더 초조해졌다. 그래서 굳이 누가 봐도 분명한 고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어발음으로 “선생님, 이건 whale이죠?”라고 소리 내 묻고 말았다. 그러니까 얘야, 믿어줘, 아줌마가 일본어는 잘 몰라도 기본 영단어는 좀 알고 있단다….
결국 일본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인 A레벨로 평가받은 뒤 나는 가타카나와 기초 한자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테스트는 굴욕적이었으나, 오랜만의 학습지 공부는 꽤 즐거웠다. 학습지에 나오는 예문들은 성인용 일본어 학습서와 달리 어린이의 흥미와 눈높이에 맞춘 내용들이 많았다. 동물이나 식물, 어린이의 생활을 주제로 한 단순한 이야기들에서 묘한 재미와 위로를 느꼈다. 예컨대 나는 이 A레벨에서 물범, 물개, 바닷코끼리 구분법 같은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또 ‘돌 위에서 3년’이라는 속담이라던지, '삐약삐약'이 일본어로 '피요피요', '멍멍'은 '왕왕'이라는 것 등도 배웠다. 귀여운 것을 배우면 마음도 정화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일본의 구몬국어(일본어) 학습지.
주어진 학습지를 다 풀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빠르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100점을 써주시곤 했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일본인 중 가장 친절하신 분이었지만, 子나 水 같은 글자에서 아래 획의 삐침이 없을 경우 절대 지나치지 않을 만큼 꼼꼼하셨다. 한자를 고쳐서 학습지를 다시 제출하면 “정말 멋져요!” “예뻐요”하며 무한 칭찬과 함께 동그라미로 꽃 모양을 그려주셨다. 마흔몇 살의 나이에도 칭찬을 받으면 기뻤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체험관광’을 하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구몬교실 초반 그 귀여움에 흥분했던 나는 애초 하루 5장이었던 숙제를 10장씩 풀겠다고 선생님께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실수였다.
다닌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부터 숙제가 밀리기 시작했다. 구몬교실에 가야 하는 화요일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그간 안 풀어서 밀린 60장의 학습지를 붙잡고 벼락치기를 했다.
조금씩 글밥 양이 많아지고 때로 휴가로 2주 분량을 몰아할 때는 감당이 안 되는 탓에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 인근이나 수영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심지어는 길을 걸으면서도 학습지를 풀었다. 때로 길에서 학습지를 푸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수첩에 학습지를 감춰 숨기고는 마치 주변 시설 검사를 나온 사람인 듯 행동하기도 했다. 아마 내 아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여하튼 덩치 큰 아줌마가 작은 구몬 학습지를 푸는 모습은 아이뿐 어른들에게도 신선하게 보였나 보다. 내 위장술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나를 따라오는 주변인들의 조용한 눈길들을 느꼈다.
아, 학습지가 밀리면 이렇게 힘든 것이었지. 결국 석 달의 수업을 마친 후 구몬교실을 접고 말았다. 그 사이 일본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잠깐이나마 학습지를 풀며 나는 우리 집 어린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 더불어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된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진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른이 되어도 숙제는 숙제일 뿐이다. 구몬 로고 어린이의 뚱한 표정을 다시금,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