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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치불고 Oct 21. 2024

오후 5시의 멜로디

Tokyo Keyword / 방재 防災

  도쿄의 우리 동네에선 오후 5시 정각이면 30초 남짓한 멜로디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보다는 조금 길고, 정규수업의 시작이나 종료를 알리는 정도 길이의 음악소리였다.

  꽤 서정적인 풍이라 고즈넉한 저녁 5시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멜로디를 들었을 땐 집 옆에 있는 학교에서 내보내는 벨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동네 곳곳 스피커에서 같은 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라 나중에는 벨소리의 목적이 좀 궁금해졌다. 곧 일을 마쳐야 하는 자영업자들을 위한 벨소리일까, 아니면 집에 있는 전업주부들을 겨냥했나. 여러분, 남편(혹은 아내)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


  나중에 정기적으로 울리는 이 멜로디 지진 같은 재난상황에 대비해서 매일 하는 테스트 방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 상황에, 또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방송 사고를 대비한 것이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곡은 조금씩 달랐다. 일본 동요를 틀어주는 곳도 있었고 조금은 발랄한 음악이 나오는 곳도 있다. 사용 취지(?)에 비해 음악이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혹은, 그래 이왕 테스트할 거면 좀 더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는 편이 낫긴 하려나. 그 목적을 알 게 되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남한에 사는 한국인들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무심한 것처럼 일본인들도 지진에 무심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인들의 무심함이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적어도 지진 대비에 관한 일본의 시스템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생활 곳곳에서 지진에 대비해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한 흔적들이 감지됐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면 집 근처 대피하는 장소에 대한 안내가 들어있는 안내문이 함께 온다. 지대가 낮아서 침수가 우려되는 지역이라면 해발 고도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표기해 뒀다. 동네 주민을 위한 공용 안내 게시판에는 지진 같은 재난재해 발생 시 대응 및 대피 방법에 대한 온‧오프라인 강의 소개가 자주 붙어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전학 간 첫날 학교 측에서 요청한 준비물은 재난대비용 안전 헬멧이었는데, 학급에서 갑작스러운 재난에 재빨리 대처하기 위해 모두 자신의 책상 옆에 헬멧을 걸어둔다고 했다.

일본에 온지 얼마지 않아 마련한 안전가방과 안전모.

   대형마트에는 재난방재 용품 코너가 따로 있고, 연초면 재난재해 시 필요한 안전가방이나 헬멧 같은 것이 홍보용 매대에 올랐다. 나 역시도 일본에 와서 이 생존용 안전가방을 구비했다. 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 되는 가방에는 구급약 키트부터 재난용 간이화장실까지 말 그대로 며칠간의 생존에 필요한 용품들이 고루 들어있었다.


   미사일의 위력을 직접 체감한 한국인은 별로 없지만 지진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입거나 주변 사람을 잃은 경험을 가진 일본인은 많다. 지난 100년간 일본에서는 숱한 지진 피해가 발생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에는 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고베 대지진에는 6400명이 사망하고 10조 엔의 재산피해가 났다. 그리고 더 가까이 2011년에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촉발한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도쿄에 살았다는 한국인 지인은 10여 년 전 그날 상황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 모든 게 다 멈췄어요. 휴대전화 연결도 잘 안 되고 공항도 전철도 대중교통도 모두 멈추고… 회사에서 집까지 몇 시간 동안 계속 걸어야 했어요. 저는 너무 무섭기도 하고 키우는 강아지도 걱정되어서 계속 울면서 걸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동요 없이 정말 긴 줄을 따라 움직였던 게 기억나요.”


  지금도 일본에서는 규모 6.0(M 6.0) 이상 지진이 매해 10~20회가량 발생한다. 어느 이른 새벽에는 우리 집 모든 휴대전화에서 일제히 “지진입니다, 지진입니다” 커다란 알람이 울렸다. 알람이 울린 얼마 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흔들림을 느꼈다. 허술하게 세워둔 가구라면 넘어졌을지도 모를 진동이었다. 다행히 그날 도쿄 일대에서 발생한 지진은 그 정도로 멈췄지만 마음의 불안은 남았다. 외국인인 나와 달리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지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내 이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지진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네 미용실 사장님은 가능한 물을 많이 준비해 놓으라고 당부했다. “물이 안 나오는 게 가장 힘들어요. 가족 1인당 큰 생수병 5~6병씩은 마련해 놔야 해요.” 일본어 교실 선생님은 “통조림처럼 오래 먹을 수 있는 예비 식량을 확보하라”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지진이 났을 때 집에서 피할 공간을 미리 확보하라고 조언했고 어떤 이는 재해가 났을 때 맨발로 피신했던 경험 때문에 신발을 늘 머리맡에 두고 잔다고도 했다.


  재난재해에 대비하는 일본인은 백조 같았다. 물 밖에선 평온해 보이지만 물 밑에서 치열하게 발장구를 쳐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일본 사회에서 쉽게 마주하는 반듯한 줄, 강박에 가까운 질서 지킴 습관 같은 게 어쩌면 수많은 재난재해를 경험하고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다만 숱한 피해를 겪고 다시 만반의 준비를 하더라도 언제 또 자연의 큰 힘 앞에선 무기력해질지 모를 일이다. 때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막대한 인재가 더해 발생하기도 한다. 결국 그 떨칠 수 없는 불안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가능한 철저히 준비하는 것. 그것뿐이다.  


  오늘도 오후 5시면 일본 전역 동네 곳곳에서 다양한 멜로디가 울릴 것이다. 언제 또 다른 재해가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는 불안한 신호이기도 하지만 지난 하루 모두가 무탈했다는 것을 깨치게 하는 감사한 알림이기도했다. 동시에 매일, 많은 이들이 미래의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작은 부분까지 잊지 않고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불안에 무심하되 어쨌건 가능한 만큼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 오후 5시의 멜로디를 들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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