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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2. 2022

노키즈존과 아동노동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1.

김소영 작가님이 쓰신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전에 읽었고 당시에도 무척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몹쓸 기억력 탓에 디테일을 챙기기 위해 다시 읽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를 거칠게 요약하면,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절로 웃음이 나고, 어떤 부분은 마치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과 같은 신선한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책이어서 꼭 리뷰해 보려고요.


다만 일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내용도 있는데, 예를 들면 '노 키즈 존'(이하 띄어쓰기 생략)에 대한 시각이 그렇습니다.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세련된 노인’이나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 손님으로 받는다고 하면 당장 문제라고 할 것을, 왜 어린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걸까?  중요한 차이가 있긴 있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


엄밀히 말하면, 노키즈존은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입장 연령 제한을 둔 것에 가깝습니다.  어린이의 외모나 태도에 따라 입장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이라면 무조건' 입장이 제한되는 것이니까요.  굳이 비교하자면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보다는 '남성 전용 클럽'  '여성 전용 사우나'에 빗대는 것이 보다 적절하겠지요.  물론 어린이라는 입장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은 가능하겠으나, 기준의 불명확성을 근거로 약자 혐오라고 결론짓는 것은 지나친 논리 비약일 것입니다.


설령 작가의 주장을, 노키즈존을 도입한 이유 자체에 대한 비판 - 즉 일부 소란스런 어린이 때문에 모든 어린이의 입장을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 - 으로 선해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다른 유형의 입장 제한을 둔 업소들도 유사한 이유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예컨대 여성 전용 사우나는 일부 남성들의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 편히 쉬기 위해서, 혹은 성범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모든 남성의 입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요?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키즈존에 대한 논란은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영업장은 엄연히 사유지이고 주인의 뜻에 따라 출입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인데, 간판을 걸고 접객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이들을 동등하게 취급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영업주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해당 영업이 공공성을 가지거나 이른바 차별금지법에 위배되는 사유(예컨대 외국인 금지)가 존재한다면 달리 볼 여지가 있겠으나,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영업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어린이 입장 제한을 둠으로써 영업주가 달성할 수 있는 적법한 이익(예컨대 정숙한 분위기 조성)이 있다면 그러한 제한이 불합리하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고요.


물론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명시한 바와 같이 모든 자유와 권리는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노키즈존에 대한 비판이 수용되어 특정 영업에 대한 노키즈존 운영이 법률로 금지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만 위 조문의 반대해석상 법률에 의하지 않은 자유의 제한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오직 여론에 근거한 영업의 자유 제한은 개인적으로 찬성하기 어렵네요. 



2.

공공복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혹은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주제가 바로 '아동노동'입니다.  아동노동이라니 이 무슨 천인공노할 단어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정작 실상을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히 고개를 저어버릴 문제는 아닙니다.  윌리엄 맥어스킬의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보시죠.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착취 공장이 좋은 일자리다.  대안이라고 해봐야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농장 일꾼, 넝마주이 등 더 형편 없는 일자리뿐이고 심지어 실직자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노동착취 공장이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노동착취 공장을 택한 노동자들이며, 갖은 애를 쓴 끝에 겨우 일자리를 얻은 사람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워낙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노동착취 공장이 상대적으로 좋은 직장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착취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높은 경쟁율을 뚫어야 함은 물론 뇌물을 제공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네요.  상황이 이렇다면, 노동착취 공장을 단속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근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성인노동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아동노동이라도 금지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 책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톰 하킨 의원이 ‘아동노동억제법’을 발의할 당시, 방글라데시에는 수많은 아동이 기성복 제조 공장에 고용돼 있었다. 법안 통과를 우려한 공장 측에서 무려 5만 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들을 발 빠르게 해고했는데, 알고 보니 이 아동들은 학교로 돌아가거나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 노동부는 “대다수 아동이 더 영세한 미등록 하청 의류공장이나 기타 업종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고했다. 다국적 기업의 하청공장이 현지 하청업체보다 임금이 높다 보니 이들 아동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유니세프 조사 결과 해고당한 미성년 의류 노동자 다수가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길거리 사기단, 성매매 등에 내몰린 사례까지 있었다.


이처럼 자유의 한계를 결정짓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도입한 자유의 제한이 항상 의도했던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과연 이 문제의 정답은 무엇일까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에 대한 건전한 논의와 비판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사회라면 언젠가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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