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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1. 2022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것들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Devils are in the details' 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가 세부사항 속에 숨어있다는 의미로, 어떤 것이 대충 보면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프로젝트 기획이나 계약서 리뷰 등의 업무를 할 때 흔히 인용되는 속담인데, 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이 속담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정말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해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로서 가장 공감이 가는 발언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천변만화하는 제 마음을,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 자아를 과연 누가 있는 그대로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는 부모님을 대입해 보아도, 인생의 반쪽이라는 배우자를 가져다 놓아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 방정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디테일'이 있었습니다.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이나 반응, 표정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일희일비하는 모습, 어디선가 보고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직접 경험하셨거나,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일 수도 있겠네요.  이처럼 상대방의 무의식적인 표현에 민감하게 구는 이유는,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대한 학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기라도 하면 그 이유나 배경을 뜯어보며 해석을 시도하면서 상대방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자아의 reverse-engineering' 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시도는 처절한 실패를 맞기 마련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디테일뿐인데, 그 디테일을 기초로 상상한 상대방의 자아는 실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좌절하죠. 


이러한 시간들을 극복한 두 연인은 마침내 인생을 약속하고, 같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며 살아갑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반응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디테일이 다시 우리를 배신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러나 너무도 사소한 행동들이 나를 미치게 만들거든요.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별 것 아닌 것들이 - 신발을 벗어놓는 방향, 빨래를 뒤집어 개는 습관, 칫솔을 놓는 위치 등이 -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빠른 속도로 식게 만듭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디테일들은 너무도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고, 따라서 개선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마치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흠이 아닌데 내 눈에는 너무나 보기 싫은 흉터처럼,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에도 하나둘 흉터가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흉터가 하나둘 쌓이면 결국 본래의 고운 피부를 가리게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감정도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디테일에 묻혀 서서히 식어갑니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정말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해줄 수 없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사소한 디테일이라고 폄하하는 것들이 사실 그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상으로 기능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당신의 그런 디테일에 오해하고 실망하며, 당신과 서서히 멀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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