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Jan 15. 2022

미국에서 징역 600년형 선고가 가능한 이유

미국과 한국의 형 선고 방식의 차이점

(본 글은 이기리, '미국에서 징역 600년형은 어떻게 부과되고 집행되는가', 사법논집 제72집, 2021, 447면 이하를 참고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형사재판에서 법원의 양형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이러한 지적은 특히 형사재판에서 훨씬 높은 형이 선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사례들과 비교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년 10월에도 미국에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상습적으로 성착취물을 제작한 사람에게 사실상  종신형인 징역 600년이 선고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아동ㆍ청소년 성착취물 범죄에 대한 낮은 처벌에 대한 비판이 다시 불거진 바 있었지요. 


우선 주의할 점은, 미국은 각 주가 개별적인 법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에 더하여 연방법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 법은 이렇다.’라고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범죄에 대한 재판은 주법원에서 처리되고 연방법원에서는 연방법 위반 등 일정한 범위의 사건들만 다루어지고 있어, 미국과 우리나라의 사례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에 대한 형 선고와 관련하여 미국법과 우리나라법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차이는 있습니다.  바로 '가중주의'와 '누적주의'인데요.  


우리나라 형법은 수 개의 범죄에 대해 한꺼번에 재판을 하여 자유형을 선고하게 되는 경우, 가장 중한 죄에 정한 형의 장기의 2분의 1을 가중한 범위 내에서 하나의 징역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이른바 가중주의 - 보다 정확히는 실체적 경합인 경우에는 가중주의, 상상적 경합의 경우에는 흡수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구분은 편의상 생략합니다).  이러한 방식에 따르면, 예컨대 묻지마 살인으로 인하여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살인죄의 형량에 50%를 가중하여 선고할 뿐, 피해자의 수를 곱하여 선고형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독일, 일본 등 주요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동시에 다수의 범죄에 대하여 형을 선고할 경우 하나의 자유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영미법계 국가들에서는 각 범죄마다 개별적으로 형을 선고합니다(이른바 누적주의).  특히 미국에서는 원칙적으로 법관이 사안의 특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각 자유형을 동시에 집행할지 또는 순차적으로 집행할지 재량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경합범의 처리에 있어서 대륙법계 국가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와 같은 영미법계의 제도 아래에서 양형에 관한 법관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동 성착취물 사건에서 피고인은 20건의 아동 포르노물 제작 범죄에 대하여 각각 30년의 자유형을 선고받았고 이를 순차적으로 집행하도록 명해짐으로써 피고인에게 부과된 전체적 형량이 600년이 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형기는 사람의 수명을 초과하는 것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종신형과 다름이 없는데, 미국 수용자들의 평균적인 수용기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실제로 종신형과 같이 집행될지는 의문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국민들의 법 감정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법률이나 제도를 도입하려고 할 때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반대논거 중 하나가 바로 '대륙법 체계와 맞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많은 나라에서 대륙법/보통법 간 구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으며 이미 우리나라에도 대륙법 체계와는 다소 동떨어진 제도들이 상당 부분 도입되에 있다는 점입니다.  


성문법만으로는 복잡다변해지는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적절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기술 발전을 입법 속도가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실무자들에게 대법원 판례는 이미 법률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상황이 이러할진대 일부 법률전문가들은 '법 체계의 정합성'이라는,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유를 들어 제도 도입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방 및 한국전쟁 이후 단시간 내에 국가의 기틀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륙법을 계수한 것은 누가 보아도 잘한 결정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다만 법률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율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는 그에 걸맞는 유연성을 가진 법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