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픔을 겪었지만, 우리의 방식은 모두 달랐다. 우리 가족은 오랜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은 세대의 집안이었고, 가족구성원이 많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구박하던 할머니는, 어머니가 딸을 출산했을 때 “먹을 이유도 없다”며 산후의 어머니를 굶겼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엄마가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지했던 조상들의 좁은 사고가 엄마의 가슴에 깊은 멍을 남겼고, 그 멍은 엄마의 삶에서 딸들에게로 이어졌다. 엄마는 시부모를 원망했지만, 그 고통을 오히려 딸들에게 쏟아냈다. “너희 때문에 내 삶은 망가졌다”고, 말하진 않아도 행동으로 그렇게 표현하셨다. 아들과 딸의 차별은 결국 우리 가족을 흩어지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엄마는 암 선고를 받고, 내 직장이 있는 도시에 모셨다. 여럿 있는 자식 중,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유난히 책임감이 강한 자식이었다. 20년 가까이 외국에 살던 내가, 부모님이 계신 작은 소도시 근처로 갑작스레 이사하게 된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건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외국에 있었던 긴 공백에 대한 속죄처럼, 부모님을 이곳저곳 모시고 다녔고, 맛있는 음식을 사 드렸으며, 늘 외로움을 타시던 두 분을 의무감처럼 챙겼다. 물론, 그 시간들이 기쁨과 사랑으로 채워졌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나에게도 그 시기는 인생의 터널을 지나던 고된 시기였다. 불확실한 미래와 어두운 감정 속에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드라이브도 하고, 장도 대신 봐드렸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 나는 조금은 덜 후회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우리 육형제 모두 다르다. 나는 막내딸이고, 내 아래로는 아들 둘이 있다. 귀하게 여겨졌던 ‘아들’을 얻은 이후 태어난 막내딸이었던 나는 언니들에 비해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두 남동생은 한동안 엄마를 ‘가장 존경하는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기억은 변질되었다. 누가, 언제, 어떤 계기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의 언니들은 하나같이 부모님을 원망의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고, 그 기억들이 모여 하나의 가족사가 된다
엄마를 처음엔 좁은 원룸으로 모셔왔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셔서 휴게소에서 기저귀를 갈아가며 응급실을 찾았지만, 의료파업으로 병원 어디에서도 엄마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내 작은 방에서 한 달 반을 함께 지냈다.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함께 산 것이 스무 살 이전이었으니, 이후 30년을 혼자 살던 내가 갑자기 병든 엄마와 함께 지낸다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좋다는 것은 다 사다드렸고, 음식 솜씨가 없어도 죽을 끓이며 정성을 다했지만, 엄마는 다른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밥도 안 준다”, “굶긴다”며 내 흉을 봤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지쳐 있었고, 더는 감정을 붙들고 있을 힘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엄마에게 남아있는 약간의 연민마저도 다 사라지겠구나. 병원이 맞겠다.’ 그렇게 판단했고,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병원이라고 해서 아무 곳이나 보낼 수는 없었다. 열두 군데를 직접 방문했고, 겨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검색해보니, 그 병원 부지는 오래전 공동묘지였고, 시신을 무연히 처리하던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지역 주민들도 꺼리는 곳이었다. 결국 그곳에 엄마를 보낼 수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엄마를 아무 데나 보낼 수 없었던 건 내 어릴 적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엄마를 모셨고, 그곳에서 좋은 간병인을 만난 덕분에 엄마는 비교적 편안해하셨다. 엄마는 우리 형제를 “별난 성격”이라 했지만, 사실은 부모님이 우리를 편안하게 대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엄마가 죽어간다 해도, 자식들이 눈물 없이 다가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상처가 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마움보다는 상처가 앞선다. 그럼에도 내가 최선을 다했던 이유는 결국 ‘의리’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건, 고마움에 대해 보답할 줄 아는 것,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상처와 서운함이 있다 해도, 부모가 죽어가는데 마음 아프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감정을 어떻게 풀어가는지는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엄마가 위독해지자, 언니들은 한 번씩 찾아왔다. 마지막 얼굴을 보겠다는 목적이었다. 감정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언니는 엄마의 손을 잡지도 않고 남을 바라보듯이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이었다. 언니의 집에 도착한 언니가 나에게 보낸 문자는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온도와 내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온도가 다르다.”라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도대체 용서 못 할 일들이 어디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부모인데 말이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는가. 나의 예술치료는, 결국 이 가족사에서 비롯되었다. 죽어가면서도 자식에게 “미안하다”, “용서해다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엄마와, 죽음 앞에서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식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얼어붙게 했는가. 부모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우리가, 그 뿌리가 사라진다 해도, 치유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가.
죽음 앞에서는 용서하지 못할 것도 결국은 용서하게 된다. 용서는 죽어가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갈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도, 어쩌면 우리는 평생이 걸리는 걸지도 모른다. 용서하자. 적어도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는, 그리고 남아있는 당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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