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예술을 닮았다.

고통을 품은 자만이 꺼내는 빛의 언어

by 이로현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랬을 거야.”


어린 시절의 엄마를 이해하고자 할 때마다 내가 붙들던 작은 다리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엄마를 이해하려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빠져나올 길 없는 정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무리 애써도 좋은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반대로 마음을 찌르는 장면들은 수도 없이 스쳐갔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방랑벽을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어느날부터 화투에 몰두했다. 그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을까, 세상과 맞서는 유일한 방식이었을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늘 없었다. 몇 집만 거치면 엄마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날엔 배가 너무 아파 겨우 엄마를 찾아냈지만, 엄마는 내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화투장에 열중한 채 상기된 얼굴로 돈을 툭 던지며 약국에 가라고 했다. 자식이고 뭐고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그 반면, 아버지는 시계처럼 정확한 사람이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저녁 5시면 칼같이 귀가했다. 엄마는 그 시간에 맞춰 손에 아버지의 저녁 찬거리를 들고 숨이 넘어가도록 달려오곤 했다.


화투에서 진 날이면 엄마의 분노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쏟아졌고, 운좋게 딴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거나 하며 천사처럼 돌변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우리 집은 평온과는 거리가 먼, 언제 감정의 폭풍이 예고 없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전쟁터였다.


엄마의 기분은 언제나 도화선이었고, 아버지는 그 폭풍의 불씨를 지켜보다 결국 폭발했다. 그 리고 그 방식은 늘 파괴적이었다. 성난 수박 하나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파괴음을 낼 때, 깨진 그 수박은 마치 붉은 살점처럼 흩어졌다. 한 언니가 조용히 울었고, 또 다른 언니가 그 울음 닥치라며 소리쳤다.

우리 집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기, 슬퍼도 티 내지 않기였다. 감정의 유로는 나약의 징표였고, 약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살 터울의 바로 위 언니는 심장이 약했다. 지금도 충격을 받으면 호흡이 잠시 멎는다. 어린 시절의 충격들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cRtM%2Fimage%2FAyWp3x7oK0Pli_PsBi8yfAOosWc.JPG 상처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Viva la vida - 인생이여 만세 ! 비바 라 비다 !


나는 강했다. 아니, 강해지려 기를 썼다. 벽에 날아드는 수박을 보며, ‘차라리 내 머리를 그 벽에 대면 수박과 함께 산산조각 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공포가 두렵지 않았고, 죽음조차 해방처럼 느껴졌다. 수박보다 더한 쇳덩이가 날아온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아이였다.


지금의 나는 그 단단한 아이를 조용히 토닥인다. ‘괜찮아, 다 지나갔어.’ 그때의 나는 탈출하고 싶었다.


우리 집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평화롭지도 않았다. 엄마는 수완이 좋았고, 아버지는 성실했다. 동네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 집을 찾았다. 부모님은 현금 더미를 대문 바로 앞의 커다란 쓰레기통 아래, 까만 비닐봉지에 돌돌 싸서 쓰레기들과 함께 숨기고 외출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나는 아버지에게 신사용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가 반대하자, 이틀간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밥을 굶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전거를 사주겠노라 약속했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사러 갔다.

“자전거 탈 줄 알아?”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한 번도 자전거를 배운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거짓말하면 큰일나는 걸 알면서도 나는 탈 줄 안다고 말했다. 난생처음 처음 타보는 자전거. 그것도 내 키보다 훨씬 큰 자전거. ‘넘어지면 그만이고, 다쳐도 그만이지.’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나와 자전거의 어이없는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저 달리고 싶었다. 커다란 트럭이 오가는 위험한 도로였지만, 클락션이 울려도 나는 ‘쳐 봐, 나 두렵지 않아.’ 그런 마음으로 달렸다. 그것은 단지 자전거가 생겼다는기쁨보다는, 언제든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다는 탈출의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초월의 감각 속에는 어떤 절망감이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살아야 할 힘을 찾아야 한다며 화투에서 위안을 구한 엄마로 인해, 우리 형제들은 집안에 방치되었다. 부모 그늘 아래 보호받았다지만, 우리에게는 공포와 좌절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날들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다. 아쉬운 것 없이 키웠다는 그 말 뒤에 가려진, 결코 정상적이지 못했던 불안한 가정사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탈출을 목표로 삼게 했다.


그 시절의 불안했던 환경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고, ‘고스톱’이라는 단어조차 상처로 남았다. 사람들은 그저 게임이라 여기겠지만, 우리에겐 화투 짝 맞추기조차도 비정상적인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흔적일 뿐이니까.

오늘 병원 침대에 누워 자식 하나 찾아오지 않는 엄마의 고독을 보며,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너무도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엄마이기에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매일 엄마를 위해 더 고통스럽지 않도록 해 달라 간절히 기도한다.

열 살짜리의 나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나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인 집 앞 성당이었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아버지의 욕설, 엄마의 울음소리. 온갖 고통의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던 성가 소리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속삭이는 듯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고통보다 낯섦을 선택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면, 나는 아무도 없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풍금 뚜껑을 조심스레 열고,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지만 어깨 너머로 익힌 멜로디를 흉내내며 손가락을 얹었다. 성가 211번,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드리오니/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받으소서”를 흥얼거리며 풍금을 두드렸다.

소리 내어 울 수 없던 아이는, 그렇게 손끝으로 슬픔을 건드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소녀는 지금도 내 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ZFDcDu5Tk0-Is1EUqws04Pp4cUY.JPG


세상에는 이보다 더한 삶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고, 그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켜 누군가를 치유하는 이들도 참 많다. 나는 예술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지 안다. 이제, 지나온 아픈 시간들을 꾸미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꺼내어 세상과 나누려 한다. 그렇게 또 한 번, 나를 살리며 동시에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심스레 보듬어보려 한다.

혹시 당신도 어린 시절을 견뎌왔나요? 그 시절은 말없이 지나간 것 같지만, 그때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을 만든 뿌리임에 틀림없어요. 나는 그 상처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꺼내놓았습니다. 당신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꺼내보세요. 분명,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빛이 될 거라 믿어요.





작가의 이전글<슬픔은 다르게 피어난다>